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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를 넘어 녹색으로

진보와 보수를 넘어 녹색으로

김동노 이사(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선거철이 되었다. 몇 년마다 반복되는 이때가 되면 망령처럼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말들이 다시 떠오른다. 진보와 보수라는 용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평소에는 묻혀있던 이 말이 선거 때가 되면 편을 가르고 서로 싸우기 위한 용어로써 힘을 갖게 되어 정치권과 언론에서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된다. 한 쪽이 다른 쪽을 비난하기 위한 용어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보수와 진보의 두 정당이 진정 보수와 진보를 대변할만한 위치에 있는가가 의심스럽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정치철학으로서 보수나 진보가 중요하게 지켜야 할 가치들이 이들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가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오히려 두 정당 사이의 차이는 미미해 보인다. 특히 지난 번 대선에서도 드러났듯이, 선거전이 진행될수록 두 정당 후보의 정책적 차이는 거의 없어져간다. 그럼에도 상대를 꼴통보수로 내몰거나 혹은 종북좌파로 비난하고 있다.

진정 진보와 보수의 가치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는 두 정당이 계속 이러한 프레임을 짜는 것은 그 속에서 두 정당이 비교적 수월하게 선거를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정당이 각 진영을 대표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기득권의 확보이며 동시에 제3당의 정치세력화를 막음으로써 그들만의 선거를 치를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우리 사회를 진보와 보수라는 허구의 틀 속으로 편 가르기를 하여 갈등을 첨예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새로운 프레임 짜기를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기존의 보수와 진보가 공유하고 있는 성장의 이데올로기 속으로 우리 사회를 가두는 것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박정희 시기 이후로 우리는 한 번도 이 성장의 신화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경제성장이 곧 빈곤을 해결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 것이라는 믿음은 우리 사회의 성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정권과 정당은 이 가치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는 곧 선거에서 표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경제성장이 누구를 위한 성장이며, 그 성장을 통해 우리는 진정 행복해졌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경제성장이 곧 빈곤을 가져오는 현재의 모순 속에서도 성장을 지고지선의 가치로 받드는 것은 누구의 믿음이며 그 속에는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경제성장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킬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성장이 필요한지를 되물어 보아야 한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회 속에서 성장의 의미를 따져보지 못한 채 막연히 성장이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합리적 근거를 결여한 신화이며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제는 제도와 이념을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어떤 제도 어떤 이념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인식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와 이념이 인간을 지배하는 주객전도의 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온 성장의 쳇바퀴 속에서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은 점점 커져 왔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배가 가라앉는 현실이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위험사회를 벗어나 안정성이 높은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는 보수와 진보의 틀을 넘어 녹색의 가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녹색의 가치는 생명의 가치이고, 안전의 가치이고, 공생의 가치이다. 모든 인간은 물론이며 인간과 자연이 함께 생명의 가치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녹색이 지향하는 사회이다. 물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산업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하지 못한 채 모순을 누적해왔다. 경제적 분배의 문제, 복지국가의 문제, 실질적 민주화의 문제 등이 눈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도 이전의 보수와 진보의 패러다임이 아닌 녹색의 패러다임 속에서 새롭게 정의되고 해결 방안이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식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인간이 만든 제도가 인간을 위한 제도가 될 것이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며칠 뒤 라디오 방송에서 우연히 들은 택시기사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는 더 이상 경제성장을 이야기 하지 말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그 분의 말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녹색의 가치를 전해주고 있다. 잘못 만들어진 제도의 희생양이 된 세월호의 어린 학생들을 통해 우리 사회를 살릴 수 있는 방법도 바로 녹색 가치 속에 담겨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