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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세입자와 월세형인간의 탄생

은행세입자와 월세형인간의 탄생 - 주거권과 기본소득
- 후기 : "주거권과 기본소득“ 포럼 

정리 : 김현(부소장)



‘은행세입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을 소유하기 위해서 혹은 전세를 얻기 위해서 많은 이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습니다. 매월 꼬박꼬박 은행에 이자를 지불하게 되는데, 예전과 다르게 집값이 오르지 않은 상황에서 은행 채무는 인생의 무게만큼이나 버겁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서울세입자협회>의 박동수 대표는 은행에 이자를 월세로 내는 ‘은행세입자’가 수두룩하다고 표현합니다. 한 문장으로 완성하면 “자가 소유자는 은행세입자”라는 신조어입니다. 

‘월세형인간’이란 말도 있습니다. 월세 세입자는 몸이 아프고 병들어 있어도 월세를 내야 하고, 실직해도 월세는 밀리지 않아야 합니다. 월세를 내기 위해서라도 경제활동은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마치 월세를 내기 위해 경제활동을 하는 것인지, 경제활동을 위해 월세를 내는 것인지 삶의 정체성이 혼미해지기도 합니다. 월세를 내지 않으면 거리로 나서야 하는 ‘월세형인간’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소득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에겐 더욱 큰 시름거리입니다. ‘은행세입자’와 ‘월세형인간’은 이 시대의 아픔을 반영한 신조어입니다. 

<녹색전환연구소>와 <전국세입자협회>가 공동으로 지난 6월 17일(수) “주거권과 기본소득” 포럼을 진행했습니다. <전국세입자협회> 김영준 사무국장과 <서울세입자협회> 박동수 대표가 발제를 맡았고. <도시사회연구소>의 홍인옥 소장이 토론에 참여해주었습니다. 김영준 국장은 국내법과 국제협약에서 규정하는 주거권의 내용과 의미, 문제점 등을 짚었고, 박동수 대표는 세입자가 직면한 주거의 생생한 사례를 현장의 경험으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그리고 홍인옥 소장은 오랫동안 주거문제를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발제에 대한 평가와 개인적인 소감을 토론해주었습니다. (자료는 홈페이지 참고)

‘주거권’의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주거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35조도 주거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다루고 있는데,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주거가 단순히 사람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로서 인권 개념으로 접근하자는 것이 주거권이 가진 의미입니다. 

최근에 반가운 소식이 들립니다. 지난 6월 22일, 그 동안 시민사회단체가 꾸준히 요구해왔던 ‘주거기본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시행일은 12월 23일부터입니다. 국회가 구성한 ‘서민주거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이 법이 논의되어 왔고, 시민사회단체는 이에 대응하여 올 초에 ‘서민주거안정연석회의’를 구성하여 법제정을 압박했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주거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이 법은 국가의 주거정책이 단순히 주택 공급계획에 맞춰져 있던 것을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주거복지 방향으로 전환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국가 정책의 측면에서도 주거권 개념이 보편적으로 확대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법제처 홈페이지에서 검색해서 볼 수 있습니다. 

세입자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법으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있습니다. 주거안정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법은 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되었는데, 대통령령에 따라 계약이나 증액이 있은 후 1년 이내에는 약정한 금액의 5%를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세가가 1억이라면 500만 원 이상 올려 받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02년 판결에서 임대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재계약을 하거나 임대차계약 종료 전이라도 당사자의 합의로 5% 이상을 증액할 수 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계약이 끝나고 재계약을 하면 새로운 계약이 된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주거권보다는 재산권을 더 중시했다는 점에서 세입자의 주거안정을 목적으로 한 ‘주택임대차보호법’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고 전문가들은 평합니다. 

이와 비슷한 법으로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존재합니다. 상가 세입자를 보호하는 이 법은 연 9% 이상 월세를 올릴 수 없도록 상한제를 두고, 5년까지 계약갱신을 허용하는 ‘계약갱신청구권’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세입자의 영업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입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과 비교한다면, 영업권은 보호하나 주거권은 보호하지 않겠다는 뜻에 다름 아니라고 김영준 국장은 지적합니다. 영업권과 주거권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는 일이나, 적어도 영업권만큼 주거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생각입니다. 

김영준 국장은 국제법의 동향도 소개했습니다. ‘세계인권선언’과 국내법적 효력을 지닌 ‘사회권규약’, 그리고 ‘인간주거선언’,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 ‘유엔인권위원회 결의’, ‘국제세입자헌장’ 등등 인간의 기본적인 주거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제법과 선언, 권고, 결의문 등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선언적인 내용으로 채워지긴 했지만, 소득과 조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나라의 법체계가 가야할 방향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김영준 국장의 기본소득 체험이었습니다.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는 김영준 국장은 5개월 간 ‘예술인복지재단’ 등에서 받은 얼마간의 지원금으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에겐 일종의 기본소득이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생계 걱정 안 하고 음반작업에 집중하면서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기본소득이 가져다 줄 미래가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야기였습니다. 

박동수 대표의 발제는 생생했습니다. 1인 대학생 평균 원룸 월세가 42만원, 고시텔․원룸텔 월세가 25~60만원, 도심형주택․오피스텔 월세가 30~120만원, 서민거주 투룸연립 월세가 20~50만원(자녀포함 가족 3~4인), 중소형 아파트(룸 2~3개, 가족거주) 월세가 60~150만원, 쪽방 월세가 20만원 전후로 주거비 부담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세 세입자든 자가 소유자든 대부분 은행대출이나 가족․지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실정이고, 그래서 박동수 대표는 ‘은행세입자’, ‘월세형인간’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전면적인 월세화 진행으로 주거비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 박동수 대표의 진단입니다. 임대인들이 은행 금리보다 2-3배 높은 월세를 선호하는 데다, 정부 관계자도 전세는 사라져야 할 구태고 월세가 선진화라고 종용하면서, 월세화의 진행 속도는 가팔라졌습니다. 문제는 정부가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정부는 공공토지마저 민간에게 매각해서 아파트를 짓도록 부추길 뿐입니다. 서민들의 주거문제는 방치됐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정규직도 세입자로 살긴 하지만, 학생이나 취업준비생, 비정규직, 파트타임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빈곤 노년층은 대부분 세입자입니다. 소득과 고용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주거비부담이 상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경제적 부담뿐만 아니라 정신적 삶이 불안정하여 이웃과 공동체 참여는 엄두도 못 냅니다. 세입자 조직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2년마다 이사를 하고 재계약을 앞둔 세입자 처지에서 임대인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는 쉽지 않은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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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거문제를 포함한 불안정한 사람들은 ‘월세형인간’이 되어 갑니다. 이 말은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전으로 치면 월세는 미래를 대비하는 저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축의 몫을 월세로 지출하다보니 미래 대비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거비를 부담하는 만큼 주거환경이 만족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비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습기와 곰팡이로 열악한 건물 상태, 채광의 미흡, 환기의 부족, 너무 덥거나 추운 주택, 치안 부재 등의 이유로 대부분 주거환경이 불만족스럽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월세 주거비부담 때문에 부모 곁으로 되돌아가거나, 셰어하우스로 주거비를 줄이거나, 교육비를 줄이는 등 새로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주거문제가 가져다주는 사회현상입니다. 

홍인옥 소장은 주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높지만, 주거권에 대한 인식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내가 사는 곳’에 대한 관심에 비해, ‘내가 누려야 할 주거의 권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낮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가장이 해야 할 역할 중에 하나는 주거를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주거 조건은 가장을 평가하는 기준이고, 여전히 그런 경향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주거권의 문제가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전환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 동안의 주거권운동이 주거권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특정 사안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고 홍인옥 소장은 이야기합니다. 예컨대, 강제철거 및 철거민문제와 노숙인을 비롯한 홈리스 문제가 우리나라 주거권 논의의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며, 주거권운동도 이를 중심으로 이어져오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보편성보다는 특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문제에 집중하다보니, 주거권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부족했던 점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또한 홍인옥 소장은 주거권의 개념이 주거복지라는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비닐하우스나 쪽방, 노숙인 같은 취약계층의 주거복지로 한정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오늘과 같은 포럼에서 세입자와 같은 보편적인 대상으로 확장하는 논의는 바람직하며, 이를 계기로 주거권 논의가 새로운 흐름으로 전개되길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끝으로, 홍인옥 소장은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제안이기 때문에 새 푸대에 담아야 하지 않냐는 제안을 합니다. 즉, 주거권과 같은 기존 구사회 의제들과 연결시키기보다는 새로운 언어와 캠페인으로 대중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전체토론 중에도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다주택자, 혹은 임대소득에 대해 어떻게 과세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지적, 특히 투명하지 않는 전․월세를 양성화하여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 그러나 한편으로 임대소득에 과세를 한들, 그것이 주거비 완화에 도움이 되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 기본소득 논의를 하면서 주거비를 포함한 최저생계비와 혼동하여 생각하는 경향에 대해, 주거문제와 기본소득은 분리해서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 등등 두어 시간 동안 깊은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포럼에 참석했던 한 청년은 이런 고민을 풀어냅니다. 은행에서 청원경찰을 하면서 150만원의 월급을 받고, 40만 원 이상의 주거비를 지출합니다. 나머지 금액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저축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정부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옮겨야 할지가 고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30만원이라도 저축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부모님 댁은 부모의 공간일 뿐, 나만의 공간이 될 수 없고, 자신만의 공간이 없다는 삶을 생각하면 짜증만 난다는 것이 이 청년의 한탄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거의 문제는 특수한 계층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회∙경제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주거 문제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여정에 놓여 있습니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더라도 주거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최소생활의 보장은 어림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주거권을 보장하는 정책과 기본소득은 함께 병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여지는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대도시의 삶을 소도시나 농촌으로 전환하거나, 다양한 공동 주거문화, 혹은 주택문화가 만들어질지도 모릅니다.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대안인 기본소득은, <조건 없이 기본소득>의 저자 바티스트 밀롱도 말했듯, 실질적으로 아무도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소외를 없애고 빈곤을 퇴치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