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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및 자료 - 칼럼
냉장고는 ‘부탁’하지 마세요

냉장고는 ‘부탁’하지 마세요

김현 (편집위원/모심과살림연구소)

“삶을 전환하려거든 냉장고부터 줄여라.”
한 포럼 자리에서 ‘전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느닷없이 냉장고가 도마에 올랐다. 삶과 사회의 전환이 ‘냉장고’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는 이야기. 갈수록 몸집을 키워가는 냉장고가 우리 생활과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바꿔오고 있었는지를 성찰토록 하는 대목이었다. 이미 익숙하게 보듯 대형마트의 성장과 함께 냉장고는 ‘대용량’으로 진화해 왔으며, 주말마다 카트 가득 채운 먹거리들이 고스란히 집안의 냉장고로 옮겨지는 풍경은 평범한 도시민들의 일상이 되었다.

2013년 기준 국내 냉장고 보급률은 가구당 1.04대로, 2000년대 초반에 이미 포화상태에 근접한 이후로는 줄곧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김치냉장고가 집집마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미 우리는 1가구 2냉장고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김치냉장고의 경우 2009년 0.75(대/가구)에서 2013년 0.86으로 증가했다.(보건복지 데이터 포털))

언젠가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이 냉장고에 응축되어 있다’고 쓴 한 철학자의 칼럼에 ‘생활인’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만큼 냉장고 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든, 상상하고 싶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냉장고가 사라진다면 자칫 여성들에게 더 많은 노동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거나 외식과 인스턴트에 의존하는 삶이 될는지도 모른다. ‘냉장고를 버리자’고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는 까닭이다. 365일 24시간, 한시도 멈추지 않는 냉장고에서 ‘전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냉장고의 두 얼굴

요리먹방의 트렌드에 발맞춰 냉장고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 또한 인기다. ‘처치곤란 천덕꾸러기 식재료’들을 구출한다는 명분하에 출연자의 냉장고가 스튜디오로 옮겨져 그 속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간혹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냉장고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냉장실 혹은 냉동실 한구석에는 언제 샀는지, 만들었는지, 넣어두었는지 모를 음식물이 반드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냉장고 안에서 ‘쓰레기’가 된 음식물들은 즉시 옆에 마련된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그런가 하면 서울 동작구에서는 냉장고 속 식재료 중 많은 양이 조리되지 않고 버려지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매달 25일을 ‘냉장고 정리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가장 사적인 공간’인 냉장고는 이렇게 매스컴에 의해 호출되고 공공의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자취생활채소소비패턴.jpg사실 냉장고는 인류에게 신선식품을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는 ‘축복’을 선사했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법, 냉장고에 의존한 우리 식생활은 어느 샌가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지금 바로 냉동실 문을 열어보면 얼마나 많은 제철음식들이 단단하게 얼어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이사하면서 냉장고를 ‘키웠다는’ 지인 역시 거꾸로 이전보다 덜 신선한 음식을 먹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대형냉장고가 삶의 질을 높여줄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역으로 작은 냉장고가 더 빠른 순환을 통해 더 신선한 식생활을 가능케 하는 역설. 오래 보관하기보다 그때그때 먹는 것이 더 맛있다는 사실도 냉장고에 길든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진리다. 

냉장고에 두었으니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은 때때로 ‘신화’가 된다. 보관하다 폐기하는 음식물 쓰레기가 전체의 9%에 달하는 현실은 그 짙은 그림자다. 구입 - 냉장고 - 쓰레기통으로 이어지는 ‘자취생의 채소 소비 패턴’을 묘사한 이미지(leftoversalad.tumblr.com)가 많은 이들의 공감과 탄식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는 비단 자취생이나 1인가구만의 현실은 아닐 것이다. 안쪽 깊숙이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냉장고로부터 해방되는 일, 꼭 특별한 레시피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무엇보다, 멀쩡한 음식물이 ‘쓰레기’가 되는 과정에 물음표를 던지게 되면서, 말하자면 냉장고 속 ‘책임소비’를 생각하게 되는 그 순간 ‘부지런히 생산하고 또 열심히 버리는’ 먹거리의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자연히 우리 집뿐 아니라 사회의 음식 순환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치게 될 것이다. 식당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를 줄이자고 요구하거나 이웃과 음식 나눔을 시도해보는 일은 그러한 일상의 작은 깨달음에서 시작될 수 있다.

냉장고에 대한 다른 생각

한때 냉장고 없이 살았던 적이 있다. 1인 가구인데다 식생활이 몹시 단조로웠던지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채소나 과일, 신선식품은 그때그때 조금씩 구입하고 이따금 시원한 음료가 먹고 싶을 땐 집앞 슈퍼에 가면 되었다. 말하자면 동네 슈퍼가 집 냉장고를 대신해주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어쩌다 한 묶음, 한 망씩 사게 되는 재료들은 고민을 안겨주었고, ‘살림’의 지혜를 필요로 했다. 얼마간 경험해보니 대부분 채소들은 저마다의 보관법에 따라 조금만 신경 쓰면 상온에서도 꽤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했다. 햇볕에 말려 두고두고 먹는 방법도 요긴했다. 가장 큰 수확은 오히려 냉장고에 넣지 말아야 하는 채소와 과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냉장고가 만능 보관소가 아니라니!

대개의 가정에서 ‘편리함’과 ‘깔끔함’을 이유로 거의 모든 종류의 식재료를 냉장고에 보관하는 게 당연시되면서 부엌마다 식재료를 보관하던 찬장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냉장과 냉동이 ‘필수’인 식품들은 갈무리하는 노동과 수고로움을 덜어주었지만 그와 함께 냉장고가 없던 시절 존재했던 생활의 지혜와 ‘맛’도 함께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장고를 버릴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을 인정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편 주어진 것을 잘 사용하면서 새로운 ‘좋음’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독일의 ‘거리 냉장고’는 그 좋은 예라 할 만하다. 내가 먹지 않는 음식을 넣어두고 필요한 음식은 가져가면 되는, 누구에게나 열린 이 냉장고는 푸드쉐어링 운동과 함께 확산되었다. 각자의 냉장고 안에서 수명을 다할 뻔했던 식재료들은 공유 냉장고에서 다시 쓰임을 찾는다. “몇 킬로그램의 음식을 아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는 발렌틴툰(’푸드쉐어링‘ 창립자)의 말처럼, 거리로 나온 냉장고가 먹거리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꾸고 나아가 조건 없는 주고받음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유경제 바람을 타고 ‘쉐어 냉장고’가 등장했다. ‘쉐어냉장고 빵빵이’ 프로젝트(http://blog.naver.com/btwn8)를 기획한 ‘사이’ 팀은 냉장고라는 개인적인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이용자들 사이에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가는 경험이 신뢰 커뮤니티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기대한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설치해 운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보다 많은 공간으로의 확장을 모색하고 있다. 몸집 키우기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냉장고의 색다른 ‘진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냉장고와 ‘삶의 전환’

이처럼 나만의 냉장고를 가득 채우는 대신 이웃과 나누는 삶. 조그만 상자에서라도 채소를 가꾸고, 음식은 가급적 직접 조리해 먹고, 양이 많다면 이웃과 나눠 먹고, 필요할 때 동네 슈퍼와 시장에서 장을 보는 일.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적은 시간 일해야 하고, 부엌 노동을 여성에게만 전가하지 않도록 ‘맞살림’ 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렇듯 삶의 전환을 냉장고로부터 시작하자 하기엔 거꾸로 그에 앞서 삶의 많은 부분에서 전환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주어진 조건만을 탓하고 있어야 할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종종 스스로 가진 많은 것들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가령 옷장 가득한 옷을 두고 ‘입을 옷이 없다’라거나, 냉장고 가득한 음식들을 모른 척하고 ‘뭘 먹을지’를 고민한다거나. 지금 냉장고를 열고, ‘천덕꾸러기’ 식재료를 구출하는 것에서부터 냉장고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작하자. 셰프의 손길이 꼭 필요친 않다. 냉장고는 ‘부탁’하는 게 아니라 ‘책임’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