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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빈곤과 나의 빈곤을 이어주는 기본소득

“너의 빈곤은 나의 빈곤을 이어주는 기본소득”
후기 - “빈곤과 기본소득” 포럼

1972년 미국 대선에서 닉슨이 당선되지 않고 민주당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이 당선됐다면 기본소득은 어떤 양상으로 변해 있을지 생각해보곤 합니다. 맥거번이 기본소득 공약을 강력하게 내걸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물론 맥거번 당선 이후에도 의회 동의가 뒤따라야 하는 등 복잡한 절차가 남았겠지만, 그런 과정에서 기본소득 담론은 한국사회에도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미국바라기인 한국의 우파 식자들이 앞다퉈 기본소득을 소개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기본소득을 생각하면 맥거번의 낙선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72년 미국 대선 때 유력 정당의 공약으로 제시될 만큼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무척 오래되고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초가 어디서부터이건, 기본소득은 빈곤문제 해소의 대안으로 제시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 한국사회만 보더라도 지난 20년간 빈곤의 심화가 가중되어 왔습니다. 2014년 ‘가계금융복지조사자료’에는 전인구 중 월 소득 77만원(중위소득 50%) 미만의 빈곤인구가 824만 명으로, 월 평균 28만원의 소득에 그쳤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이 장기화되면서 빈곤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프리케리어트 계층이 두텁게 형성된 것이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빈곤해소가 한국사회 최대의 과제가 된 것입니다. 

지난 7월 28일, “빈곤과 기본소득”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제3차 <녹색전환연구소>의 기본소득 포럼은 뜨거운 주제인 만큼,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고, 자리에 앉지 못한 참석자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발제를 맡았던 (사)참누리 빈곤문제연구소 서병수 소장은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소득체제에 대해 두 가지 물음을 던집니다. 첫째, 기본소득은 빈곤을 해소하는가? 둘째, 기본소득체제는 장기적으로 미래세대까지 지속될 수 있는가? 그리고 사회발전, 즉 삶의 질의 지속적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서병수 소장은 여러 통계를 제시하며 그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기본소득은 최저소득을 보장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최저소득은 생계비와 주거비를 의미합니다. 법적으로는 ‘최저생계비’라고 명문화되어 있으며,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뜻합니다. 그러나 잘 알고 있듯이, 최저생계비가 임의적이고, 타당하지 않은 계측방법으로 인하여 과소 계측되고 있다는 점이 끊임없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아무튼, 현재 최저생계비 수준은 중위소득 몇 퍼센트에 맞추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OECD 주요국의 최저소득보장 중 한국은 중위소득 26%에 불과합니다. 2013년 자료입니다. 일본은 67%, 네덜란드는 65%, 덴마크는 61% 등 OECD 국가들의 평균은 50%를 넘습니다. 이 자료만으로도 정부가 정한 우리나라 최저생계비 수준은 턱없이 부족하며, 이 기준에 따라 최저소득은 63만 원 정도에 그칩니다. 만약 이를 OECD 평균에 맞춰 중위소득 50%라고 한다면, 77만원이 넘습니다. 14만 원 가량의 차이가 생깁니다. 

이러한 데이터를 제시하며 서병수 소장은 강남훈 교수가 제시하는 기본소득 월 30만원이 과연 빈곤을 해소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OECD 평균 최저생계비 77만원에 47만원이 부족하고, 한국이 정한 63만원에도 33만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소득빈곤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 서병수 소장의 진단입니다. 더구나 빈곤이라는 것이 꼭 소득빈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산부족, 교육부족, 의료결핍, 사회적 관계 결핍, 문화 결핍, 노동의 결핍 등등 빈곤은 매우 다차원적인 현상이므로 기본소득이 소득부족만 지원한다고 해서 나머지 빈곤문제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서병수 소장이 제시하는 것은 30-40만원의 부분적인 기본소득을 제공하더라도 의료나 교육, 그 외 다양한 공공부조시스템이 맞물리지 않는다면 기본소득이 노리는 빈곤해소는 요원한 일입니다. 

두 번째 물음은 과연 기본소득체제가 지속가능한가입니다. 매월 기본소득 30만원을 받는다고 해서 노동에 대한 의욕이 생길 것인가, 또는 임금이 높아지면 소비지출이 호전되고 경제성장에 기여함으로써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는 순환적인 경제체제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따져봅니다. 서병수 소장은 삶의 질 측면에서 기본소득이 선순환이 되는 생산성 향상에 확고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서병수 소장은 이 날 포럼을 위해 지난 5월에 발표된 “무조건적 기본소득제도는 다른 복지제도를 대체하는가?”(Ugo Colombino, 2015, “Is unconditional basic income a viable alternative to other social welfare measures?” IZA World of Labor paper, Feb. 2015)라는 논문의 핵심적 내용을 번역하여 참석자에게 나눠준 후(자료는 홈페이지 참고), “자동화와 세계화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재분배기능, 구조적 위험에 대한 효율적 버퍼기능, 노동유인의 증대, 빈곤의 덫을 벗어나는 점에서는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무조건적 기본소득이 선별적 조건부 공공부조보다 더 나은 대체 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노동시간이나 노동참여는 그 중요성이 낮아지고, 장기적인 노동공급으로서 교육, 취업선택, 역량향상과 같은 요소들이 더 중요”하게 될 것이며, “대체효과에 대한 실증은 많으나, 소득효과에 관한 실증은 여전히 논쟁 중인 점” 등의 결과를 들며, 기본소득체제는 사회자본과 인간자본에 대한 사회투자가 동시에 일어나야 선순환의 조건이 가능하다고 진단합니다. 따라서 녹색당이 기본소득정책을 주장할 때에는 사회투자 전략의 큰 그림 속에 기본소득이 하나의 정책패키지로 제시될 때 유용한 정책이 된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왜 기본소득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가로 서두를 꺼냅니다. 빈곤은 과연 개인의 문제인가? 한국사회가 복지국가를 주장하든 기본소득을 주장하든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는 빈곤을 개인의 차원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풍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승수 위원장은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일자리를 늘려 빈곤문제를 해결하려는 보수 진영의 오랜 논리는 일자리 자체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현 상황에서는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논리가 되었습니다. 경제성장의 ‘낙수효과’라는 논리도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이 장기화되면서 ‘워킹푸어’가 일반화되고 있으며, 자영업자의 몰락, 빈곤의 대물림 등 빈곤이 개인의 차원을 벗어났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노동이 빈곤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무너진 지는 오래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논리는 더욱 정당성을 잃어갑니다. 노동만으로 소득을 해결하려는 근대적 사고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하승수 위원장은 기본소득은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개인주의적 빈곤관’이나 ‘일 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논리에 빠져나올 수 있는 해법의 실마리라고 판단합니다. 

다행인 것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빈곤해소를 위한 변화의 물결이 감지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의 단초가 ‘노인기초연금’입니다. 한국에서 보편적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이 허황된 꿈으로 치부되다가, 조건 없이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정치적 선언은(물론, 현재는 노인의 70%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많은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승수 위원장은 정치적으로 선별적 복지를 강화하는 것이 더 실현가능성이 높은가?, 아니면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 제도가 정치적으로 실현가능성이 높은가를 따져봐야 한다고 묻습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진보진영보다 더 과감하게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을 주겠다는 보편적 복지정책을 제시하였고, 이를 통해 대중들의 지지와 동의를 얻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런 선례를 본다면 정치적으로 선별적 복지정책보다 보편적인 소득보장 제도가 더 실현가능성이 높다고 하승수 위원장은 이야기합니다. 특히 청년층은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기존처럼 고용된 기업에서 복지혜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국가 복지제도 측면에서도 청년계층은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외딴섬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기초생활수급제도를 보완하여 청년층 복지를 강화하자는 메시지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지도 의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기초연금’의 사례에서 보듯이, 보편적 소득보장 제도가 국민들로부터 더 동의를 얻을 수 있는 토대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의 대표적인 쟁점은 재원마련일 것입니다. 하승수 위원장은 재원문제를 고민할 때, 자기검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OECD에서 발표하는 “OECD Revenue Statistics 2014”라는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조세부담률과 의무적 사회보장기여금을 합치면 24.3%에 머물러 있습니다. OECD 평균은 34.1%입니다. 쉽게 계산하면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을 OECD 평균에 맞출 경우, 즉 10%를 더 올린다면, 188.6조가 걷히게 됩니다. 그럴 경우 기본소득 30만원 지급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관건은 과연 10% 올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국민의 조세저항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하승수 위원장은 유럽의 복지국가 사례를 듭니다. 덴마크는 1965년 조세부담률이 29.5%였지만, 1971년에는 40.8%로 끌어올렸습니다. 사회적 합의로 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덴마크는 경제적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덴마크는 지금도 세계 최고의 복지수준과 높은 국민 행복도를 보이고 있는 국가입니다. 특히 많은 이들은 증세와 경제성장을 연동해서 생각합니다. 경제성장을 전제로 한 증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을 한다고 해서 세수입이 반드시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성장을 하지 않는다고 세수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조세란 과세대상과 세율 등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서 경제성장과 연동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법인세는 경제성장과 연동되어 있지만, 상속세는 경기변동과 무관합니다. 환경세나 생태세 등도 대표적입니다. 따라서 기본소득 재원마련을 위한 증세는 경제∙재정적인 측면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강조합니다. 

물론 기본소득만으로 빈곤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OECD 평균인 77만원을 맞추기 위해 기본소득 이외에 추가급여가 필요합니다. 현재, 장애인의 경우 ‘장애인연금법’에 의해 부과되는 급여는 8만원에 불과합니다. 장애로 들어가는 치료비나 재활비용 부담에 턱없이 부족한 금액입니다. 따라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더라도 기존 복지제도들이 어느 정도 유지되거나 보완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투자지원재단 사회적경제연구센터 신명호 소장은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으로 각자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대전제처럼 통용되어 왔고, 그렇기 때문에 빈곤과 소득불평등의 문제는 곧 고용의 문제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그리고 21세기 들어서면서 노동에 대한 의지와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현상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더 급속하게 보편화되기 시작했다고 진단합니다. 따라서 고용과 무관한 삶의 유지방식이 필요한데, 그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캐나다 퀘벡주의 장애인들이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을 소개합니다. 지적장애인들이 유기농 채소를 재배해서 그 지역에 내다팝니다. 그것을 통해서 장애인들이 가져가는 급여는 생활을 영위할 만큼 충분한 금액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생활이 가능할까? 알고 보니 기본적인 장애수당이 별도로 존재했고, 여기에 사회적 기업을 통해 번 급여는 보조적인 수단이었다고 신명호 소장은 이야기합니다. 사회적 기업을 잘 운영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기본소득과 같은 소득보장제도가 갖춰졌을 때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이 훨씬 더 안정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겠다고 진단합니다. 

신명호 소장은 기본소득에 우호적이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대중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기본소득의 매력 중에 하나는 ‘무조건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대중들이 실현가능성이 낮다고 보는 이유도 이 ‘무조건성’에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윤리적 가치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일을 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일하는 사람이 먹여 살려야 하는가라는 윤리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원래 존재하는 공유재에서 만들어지는 돈을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거나, 시민이기 때문에 권리가 생긴다는 시민권의 논리만으로 넘을 수 없는 높은 산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호 소장은 이런 논리를 깰 수 있는 디테일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기본소득 재원마련을 위해 세율만 올린다고 될 문제는 아니며, 더 심각한 것은 세금 징수체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조세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직접세율을 크게 인상한다고 해서 조세수입이 동반해서 늘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직접세율이 올라갈수록 조세저항이 커지게 되고 조세를 회피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모든 직접세를 폐지하고 부가가치세로 단일화함으로써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자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신명호 소장은 이 방식이 바람직한지는 모르겠지만, 조세 징수의 구조적인 문제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하고, 이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고 주문합니다.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조문영 교수는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은 좋지만, 한국사회 현장을 제대로 들여다보면서 경험적인 관찰과 연구로부터 기본소득이 정당성을 찾아가야 한다고 운을 뗍니다. 그러면서 조문영 교수는 빈곤을 두 가지 차원에서 규정합니다. 하나는 ‘물질적 빈곤화’ 과정과 ‘실존과 소통의 빈곤화’ 과정이 그것입니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10%의 부자와 90%의 빈자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90%의 빈자 중에는 빈곤의 대물림과 같은 만성적인 빈곤에 시달리는 집단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글로벌 자본주의가 변덕스럽게 요동을 치는 과정에서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그럴 가능성에 불안감에 시달리는 집단이 있습니다. 이런 불안감은 실존과 소통의 빈곤화와 연결됩니다. 이 두 가지 빈곤의 과정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고용 없는 성장은 잉여가치의 창출과 축적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시스템이 야기한 생태적인 파국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세계 청년들은 적게 벌고, 적게 쓰고, 함께 쓰고 나누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지니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국의 청년세대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은 압축성장과 개발주의식 근대화를 통해 다져진 경쟁문화에 편입되어, 개인은 물론이고 가족, 기업, 대학 등 전부 다 혼신의 힘을 쏟아 비좁은 몇 몇 자리를 차지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쳐다볼 겨를이 없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이 이 파국에서 벗어나길 갈망할 뿐입니다.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고, 실존과 소통의 빈곤화는 강화된다고 조문영 교수는 이야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제일 불행한가? 결국 스스로가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며,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이들의 절대적인 빈곤, 물질적인 빈곤에 대해서 주목할 수가 없습니다. 달동네나 철거투쟁 등 집합적 가난을 등장시켰던 예전의 영화와는 달리, 최근의 영화는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의 빈곤을 등장시킵니다. 너의 빈곤과 나의 빈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일한 구조의 결과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의 빈곤을 마주하지 않는 상황이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 조문영 교수의 분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나의 빈곤과 너의 빈곤을 이어주는 훌륭한 작업이며, 나아가 물질적 빈곤과 실존과 소통의 빈곤화를 이어주는 연대의 고리가 될 수 있다고 조문영 교수는 기대를 겁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사회적 연대나 인간됨의 의미를 성찰하는 작업과 병행할 것은 조문영 교수는 주문합니다.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해야 한다는 프레임에 갖춰 “나에게 30만원이 주어진다면”과 같은 방식은 기본소득이 가진 사회적 의미가 가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정 집단을 구획했던 기존의 복지정책은 오히려 빈곤문제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자영업자든 백수청년이든 모두가 공통의 파국을 직시하는 선언, 이를 테면 “못 살겠다, 기본소득”과 같은 정치적인 선언으로 기본소득을 출발시킴으로써 빈곤의 고리를 사회적 연대의 방식으로 돌파하자는 제안도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몇 가지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가야 하는가? 요즘 들어 떠오르는 생각들입니다. 기본소득이 풀어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지만, 실현된다 하더라도 다차원적인 빈곤을 해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우리가 꿈꾸는 녹색사회에 대한 비전과 플랜이 나오고, 그 안에서 기본소득을 비롯한 경제의 문제, 평화의 문제 등등이 맞물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새로운 판을 짜야 할지 모릅니다. 전통적인 좌우 논쟁이 놓치고 있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사회문제를 다시 조명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연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요? 이번 포럼은 여러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기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