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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 학교교육에 방황하는 히치하이커들을 위한 안내서

“기본소득 - 학교교육에 방황하는 히치하이커들을 위한 안내서”
후기 : “교육과 기본소득”포럼

머리가 지끈거리는 의제 중에 하나는 교육 분야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우리나라 중학교 취학률은 97.7%, 고등학교 취학률은 93.7%, 대학교 등 고등교육 취학률은 68.2%에 달합니다. 이 통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교육을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교육현장의 좋거나 나쁜 기억들, 가능성과 한계를 몸소 겪은 사람들은 학창시절을 술안주거리로 삼기도 합니다. 이렇듯 누구나 교육문제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하는 해법을 내놓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올해 초, ‘인성교육진흥법’이라는 법이 제정되었고, 7월 말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이 붕괴된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정의화 국회의장이 이 법의 취지를 설명했을 때, 과연 세월호 참사가 인성교육 미비로 발생한 것이었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 잠깐 법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인성교육 인증제를 시행하고, 이를 위해 전문인력양성기관을 지정한다는 것이 핵심내용이었습니다. 일각에서 인성교육을 대학입시에 반영하는 것을 시도하였으나, 냉랭한 여론으로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국격이 높아졌음에도, 국민의 나라사랑정신과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약화된다”는 이유로 ‘나라사랑교육지원법’이 입법예고된 상태입니다. ‘인성교육진흥법’이 교육부장관이 주도하는 것이라면 ‘나라사랑교육지원법’은 국가보훈처장이 주도합니다. 지난 21일, ‘나라사랑교육 발전을 위한 학술회의’에서 국가보훈처의 황의균 과장은 “학생들이 국가 정체성과 호국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청소년들이 태극기와 청와대, 국회의사당 등을 그려보는 등의 체험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니,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태극기를 그리면 국가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이 발현된다는 논리는 과거로 회귀하자는 제안으로 들립니다. 저로서는 아동∙청소년들에게 이 법의 취지를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국민 개개인의 삶이 행복하다면 국가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은 자연스럽게 발현될 것입니다. 교육문제의 본질이 회피된 것입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네요. 국민들은 달을 가리키는데, 정부와 교피아들은 자꾸 손가락만 바라봅니다. 이런 현상은 교육문제가 난맥상임을 잘 드러냅니다. 

이런 난맥상을 지닌 교육문제를 주제로 지난 8월 28일, ‘교육공동체 벗’과 공동으로 서울NPO지원센터에서 기본소득 포럼을 진행했습니다. 교육 문제와 기본소득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또는 연결고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발제자와 토론자, 그리고 50여명에 가까운 참가자들이 진지하게 토론한 자리였습니다. 

<오늘의 교육> 공현 편집위원의 발제는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기본소득의 역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습니다. ‘교육불가능’론은 2011년 무렵에 <교육동동체 벗>이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발간하면서 등장했습니다. 현재의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학교교육이 본래 의미를 잃었고, 다수의 학생들이 학교 수업 참여에 동기를 잃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식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교육불가능’론은 학교교육의 본래 의미를 되살리도록 변화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교육은 불가능하다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교육문제는 교육이라는 울타리 안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공현 편집위원이 밝히고 있듯이, 학교교육은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학력인증의 과정을 밟는 경로로 여겨지는 경향이 짙습니다. 학력인증은 소득보장을 인증하는 증명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얼마 되지 않은 이 인증서를 획득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싸워야 하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학교를 벗어난 사회는 신자유주의가 뿌리내리면서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 실업의 문제가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을 지탱했던 외적 요인들이 무너져 내림으로써,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소위 좋은 대학에 입학한다고 해도 졸업 이후 생존을 보장받지도, 고소득을 보장받지도 못하는 불안정한 사회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런 변화된 사회에서 교육은 자체 혁신만으로 변화된 사회에 적응할 수 없다고 공현 편집위원은 진단합니다. 

그래서 학교교육은 이중적인 의미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학교교육에서의 성취가 자신이 속한 계급이나 소득 수준에 큰 영향을 주지만, 설령 높은 성취를 획득했다 하더라도 계급 상승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르치는 교사나 배우는 학생에게 학교교육은 즉각적인 위기가 됩니다. 따라서 공현 편집위원은 학교교육의 변화만으로 교육문제를 돌파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학교교육이 뿌리를 두고 있는 지반, 즉 사회적 상황들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교육문제도 풀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육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의 변화와 동반되어야 하고, 먹고 사는 문제의 모델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교육불가능’도 해소될 수 있다고 공현 편집위원은 말합니다. 

공현 편집위원이 기본소득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한다는 기본소득의 아이디어는 우리 사회가 노동을 통해서 생계를 보장받는 모델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임노동이나 일자리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다른 경로로 생존을 보장받는다는 아이디어는 교육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학교는 학생들을 취업시켜야 한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본소득이 도입된다고 해서 학교교육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육의 문제는 별도의 해법이 필요할 것입니다. 삶에 밀착한 교육, 정치, 경제, 문화 활동과 연계된 교육으로 변화시키는 별도의 비전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 공현 편집위원은 기본소득의 도입이 학교교육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겠지만, 역으로 기본소득이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교육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함을 말합니다. 서로가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기획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기본소득과 청소년의 권리’를 주제로 발표한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의 스밀라 운영위원은 청소년의 입장에서 기본소득을 풀어냈습니다. 미성년자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할 것인가는 기본소득 모델 중에서도 하나의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스밀라 운영위원은 청소년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문제는 그 사회에서 청소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직결된다고 말합니다.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본다면, 그 사회는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하는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기본소득을 보호자에게 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청소년을 하나의 주체로 본다면 성인과 마찬가지로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는 우리나라는 기본소득을 보호자에게 제공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청소년 스스로가 소득의 사용처를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이러한 질문은 ‘사회 구성원이 서로를 신뢰하는 사회인가’와 맞물려 있습니다. 비단 청소년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기본소득이 실현된 사회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시민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최소한의 시민권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청소년에게도 기본소득을 줄 것인가, 그리고 준다면 얼마를 줄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사회적 신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스밀라 운영위원은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성년자는 돈을 헤프게 쓰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인보다 돈의 지출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기본소득 대상으로부터 청소년을 배제하기도 합니다. 스밀라 운영위원은 과연 이 논리가 타당한지 따져봅니다. 예컨대, 돈을 헤프게 사용할 것이라는 지적은 청소년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우려입니다. 또한 청소년들의 지출규모가 작은 이유가 애초에 돈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돈이 있더라도 아껴 쓰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혼자 살거나, 혹은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청소년들의 씀씀이는 일반 성인들의 지출규모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기본소득은 최소한이 생계를 유지하는 비빌 언덕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스밀라 운영위원은 조건 없이 모두에게 준다는 기본소득의 철학을 살린다면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 입증할 필요가 없도록” 기본소득의 보편성을 살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제공되는 기본소득은 경제적 여유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계획할 때 넓은 가시거리를 확보해주기도 합니다. 기본소득은 불안정한 노동에 힘을 실어주는 매개라고 스밀라 편집위원은 분석합니다.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누군가로부터 종속된 청소년’의 지위가 독립적인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은 청소년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스밀라 운영위원은 현재의 조건에서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상당한 자본이 멀티플렉스로 흘러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경제교육과 맞물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덧붙입니다. 어려서부터 돈의 씀씀이에 대해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고, 지출결과에 대한 책임감, 독립적 삶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불가피하게 사교육 시장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기에, 공교육 밖의 영역이 보다 지속가능하게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스밀라는 말합니다. 공현 편집위원이 이야기한, ‘교육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취지와 연결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토론에 참여한 하승우 박사는 두 발제에 공감하면서, 삶의 변화가 없다면 교육의 변화도 요원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평등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한국사회의 중요한 과제라면, 기본소득이 이 문제를 풀어내는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특히 그는 교육이 담당했던 ‘노동연계모델’이 기본소득의 실현으로 재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노동중심 사회의 역사가 한 순간에 방향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달려온 스피드를 멈추게 하는 마찰력을 기본소득이 얼마나 발휘할 수 있을지는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노동연계모델’에 파열음을 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기대감입니다. 

교육은 비단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하승우 박사가 살고 있는 충북 옥천만 하더라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65세 노인들입니다. 오히려 농촌에서는 ‘평생교육’이 삶의 방식에 영향을 줄만큼 중요한 의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농촌에서의 평생교육은 노인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프로그램이 많고, 기관 중심의 프로그램이라는 한계를 지닙니다. 농촌에서의 개개인의 삶과 괴리된 교육의 내용이라는 한계를 지닙니다. 과연 기본소득은 기관 중심의 교육 틀을 깰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개척해 가는 교육적 효과에 기본소득이 부흥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미지수라는 것이 하승우 박사의 생각입니다. 

오히려 청소년들의 시민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권리인 참정권과 맞물릴 수밖에 없습니다. 청소년도 소비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내는 주체임에도 세금의 쓰임에 대해서 어떠한 권리를 갖지 못합니다. 따라서 투표연령이 낮아진다면 교육을 비롯한 여러 기형적인 문제들의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승우 박사는 말합니다. 기본소득을 통해 경제적 시민권이 획득되듯이, 참정권을 통해 정치적 시민권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하승우 박사는 이야기합니다. 

다만 ‘소득’이라는 말의 모호성에 대해서는 곱씹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하승우 박사는 하나의 사례를 듭니다. 수몰지역 주민들에게 ‘주민지역사업비’가 나오는데, 어느 동네는 n분의 1로 나눠서 쓰고, 어느 동네는 마을기금으로 모아서 씁니다. 전자는 주민 개개인의 생계에 보탬이 되겠지만, 지역의 변화효과에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마을을 위해 쓰기 때문에, 작더라도 지역발전에 효과를 보입니다. 소득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개인의 결정권에 달려 있겠지만, 과연 소득이 한 사람의 결정권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이 부분은 기본소득 이후의 경로인 것 같습니다. 기본소득이라는 첫 단추를 꿴 뒤에 두 번째 단추를 어떻게 맞출 것인가를 염두하자는 제언이었습니다. 인생이 훈련의 과정이듯, 기본소득을 매개한 훈련의 여정도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발제와 토론을 마치고 남은 시간 동안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기본소득이 청소년들의 미래에 어떤 구체적인 가능성을 열어줄 것인가, 청소년 참정권은 기대한 만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기본소득이 실현된 사회에서 디스토피아적 현상은 없는가, 공교육은 모든 교육수요를 해소할 수 있는가, 기본소득의 보장은 오히려 통제의 수단 혹은 정상화 논리의 기반처럼 해석될 위험은 없는가 등등 기본소득을 둘러싼 다양한 쟁점들에 대한 이후 과제들을 남기며 2시간 동안의 토론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방랑자의 임금’인 기본소득이 교육으로부터 청소년을 얼마나 해방시킬 수 있을까요?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기본소득이 실현된 사회. 적어도 기본소득은 학교교육에서 방황하는 히치하이커들에게 미래 여행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안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녹색전환연구소>의 기본소득 연구는 그런 ‘안내서’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