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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채식인의 일주일

어느 채식인의 일주일

얼마 전 발간된 책 『전기 없이 우아하게』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파괴된 지역의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한 뒤 ‘전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한 일본인 기자의 ‘5암페어 생활’(1) 분투기다. 가전제품의 편리함 이면의 세계에 대해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그에게도 ‘전환’의 순간은 그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데는 반복되는 구호가 아니라 직접 겪은 한 번의 사건, 하나의 장면으로 충분할 때가 있는 것처럼.

그보다 조금 앞서 개봉한 영화 <잡식 가족의 딜레마>에서 황윤 감독은 야생동물과 환경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던 자신 역시도 늘 먹는 고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물음을 갖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돈가스 마니아’였던 그를 바꾼 것은 돼지농장(이라기보다는 공장)에서 본 ‘진짜 돼지’들의 모습이었다. 

뒤늦게 찾아본 그 영화는 나에게도 ‘5암페어 생활’ 못지않게 도전적인 ‘고기 없는 식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채식을 ‘선언’한 지 10여 년, 이제는 공장식 축산의 폐해라든가 세계적인 식량 불균형 문제, 동물권 등의 이야기에도 무감해져버린, 말하자면 ‘습관적’ 채식이라 할 만한 지금의 식생활을 돌아본다. 소심한 성격 탓도 있겠으나 또한 함께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으려 메뉴 선정은 적당히 남들에게 맡기고, ‘뭐라도 먹을 수 있다’며 유연함을 과시해보지만 때때로 정말 먹을 만한 게 없어서 난감해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경우에 따라 적당히 육류도 먹게 되는, 고무줄 같은 채식 생활을 이어가던 차에 본 그 영화 덕에 문득 ‘고기를 먹는 일’에 대해 같이 생각해보자고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수없이 쏟아지는 채식과 육식에 관한 정보와 주장들을 옮기는 대신 날마다 마주한 밥상 위 성찰로부터.

D+1.
회의를 겸한 점심 식사. 사무실 근처 치킨집에서는 점심 메뉴로 모밀과 돈가스, 치킨가스 따위를 내고 있었다. ‘돈’과 ‘치킨’ 사이 고민하는 동료들 틈에서 ‘고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렸다. 아무래도 전날 본 영화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는지, “돈가스가 돼지로 보일” 정도는 아니더라도 거듭되는 임신과 출산으로 힘겨워하던 어미돼지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모른 척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치킨집에 앉아 어찌 돼지의 안위만을 걱정할까.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소비된 닭고기는 1인당 15마리 정도. 1달1닭 이상이다. 불금의 진리는 치맥이고 퍽퍽한 닭가슴살이 다이어트 식단까지 점령한 시대에도 여전히 삼복더위에 가장 ‘핫’한 곳은 삼계탕집이다. (전체 닭고기 소비량의 30~40%가량이 복날을 전후해 판매된다고 한다.) 필요와 과잉 사이, 아무래도 균형추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D+2.
어김없이 고깃집이다. 자고로 ‘회식’이라면 구워야 맛인 걸까. 번화가의 골목마다 즐비한 고깃집들. 웃는 돼지의 얼굴이 그려진 간판에는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돼지”라는 한 돼지고기 브랜드의 홍보 문구에 정신이 아뜩해진다. 축사의 동물과 불판 위 고기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자연과 우리의 거리는 너무 멀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며 무절임과 김치 따위를 무심히 집어먹던 중에, 재빠른 손놀림으로 고기를 굽던 식당 아주머니께서 잘 익은 고기 세 점을 친절히 ‘배급’ 해주셨다.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입에 넣었는데 그 맛은, 나쁘지 않았다. ‘더 맛이 없는 음식이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만큼.
직장인 선호 회식 메뉴 1위에 빛나는 삼겹살이 아니더라도, 육해공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메뉴의 향연 속에 채식인들이 ‘먹을 권리’를 찾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다수의 ‘먹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는 ‘소심한’ 채식인들에게는 더더욱.) 평상시에도 다양한 형태로 육류를 적잖이 섭취하지만 특별한 날에는 더욱 특별하게 고기를 찾는 식문화 속에 우리나라 1인당 육류 소비량은 매해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2013년 42.7kg).

D+3.
지인과의 저녁 약속. 집 떠난 자취생활과 고된 육체노동 탓인지 의도치 않은 ‘다이어트’ 중인 그와 함께 밥을 먹자니 굳이 ‘고기’를 떠올리진 않았지만 결국 들어간 곳은 돼지고기김치찌개를 파는 식당. 2인분의 고기를 혼자 먹기란 아무래도 무리라 몇 점의 고기가 내 몫으로 할당되었고, 결국 이틀 연속 ‘유연함의 미덕’을 발휘하고 말았다.
육식과 채식의 영양학,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는 여전히 학설과 의견이 분분하다. 때로는 ‘건강 식단’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되고, 때로는 ‘부실 식단’으로 폄하되기도 하는 채식 밥상. 양극단의 평가는 육식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한 끼의 고기찌개가 그의 체력에 보탬이 되었을지. ‘필요에 따라 적당하게‘가 정답이겠지만 그 ‘적당함’은 과연 어디쯤일까.

D+4.
점심시간에 찾은 사무실 근처 중국집에서는 비교적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었지만, 고기는 피하더라도 해물까지 없는 음식을 찾기는 어려웠다. 채식 초기에는 ‘간짜장에 고기를 빼달라고 하면 된다’는 선배 채식인들의 조언을 따라 해보기도 하고(어디서나 이렇게 해주진 않는다) 최근에는 해물과 계란을 뺀 우동을 주문하곤 했으나, 이날의 선택은 짬뽕밥. 무언가를 추가로 요구해야 하는 일이 이따금 번거롭고 귀찮게 느껴진다.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다는 것이 이런 순간에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분명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텐데.

D+5.
명절 차례음식 준비에 분주한 날. 고기를 넣지 않은 동그랑땡과 잡채를 먹고 싶다는 바람은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TV와 각종 미디어에서 명절 음식의 높은 열량을 연신 경고하지만 특별한 중에도 더욱 특별한 날, 잘 먹이고 잘 먹고 싶은 마음들을 이기기란 역시 어렵다.

D+6.
친구와 함께 간 일본식 주점. 돈가스를 먹는 친구 앞에서 무심코 돼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채식(위주의 식생활)을 시도하기 어려운 이유가 그를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할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잦은 외식과 바쁜 생활에 가장 쉽게 고를 수 있는 음식에는 대개 육류가 빠지지 않고, 거꾸로 채식은 너무 멀리 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어렵고 까다로운’ 채식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늘 도시락을 싸서 다니지 않고 조금 게을러도 할 수 있는 채식의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가는 일이라는 결론.
현재 채식 인구에 대해서는 공식 통계는 없지만 대략 1% 내외로 추정한다. 반면 채식을 할 의향이 있다는 ‘잠재적 채식 인구’는 20%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다시 ‘5암페어 도전기’에 빗댄다면, 고되고 불편한 생활을 감내하겠다는 자세 대신 유쾌하고 우아한 생활 방식으로 절전 생활을 ‘재창조’하듯이 채식 또한 누군가 정해놓은 기준에 얽매이기보다 삶의 건강한 변화를 만들고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더 폭넓은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잠재적 채식 인구’는 물론 다른 80%의 사람들에게도.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도 원전에서 생산되고 송전탑으로 전달되는 전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탈핵을 염원하고 가능한 대안을 모색해나가는 것처럼, 다수가 당장 고기를 끊을 수 없더라도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는 인식을 확산하고 염원대로 탈‘공장식 축산’의 세상에서 굶주리지 않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도 ‘채식주의’가 엄격함을 벗고 누구나 취할 수 있는 하나의 태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를 통해 우리 밥상에서 다른 생명의 고통과 희생을 조금씩 덜고 대신에 그만큼의 평화를 얹을 수 있게 되기를. 그 시작은 오늘의 한 끼 식사에서 ‘상품’보다 ‘생명’에 보다 가까운 먹을거리를 택하는 일이다.

각주
(1) 5암페어의 최저량으로 전력회사와 계약을 맺고 그 소비전력 한도 내에서 생활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