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전환연구소 로고
알림 - 칼럼
자존심 세워주는 사회를 위하여

일제 식민지 시절 그들을 위한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은 경제가 사회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경제주의적 사고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 친일파들이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한국 사회는 경제주의적 사고에 깊이 물들게 되었다. 특히, 일본군 장교 출신 대통령의 ‘경제성장제일주의’ 근대화를 통해, 한국은 경제주의가 지배적인 사회가 되었다. 이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 세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주의적 경향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들이 기반했던 진보적 이데올로기도 소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경제주의적인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계급을 사회적인 개념이라기보다 경제적인 개념으로 이해했고, 물질적 부의 확대에 대해서는 이견을 갖지 않았다. 좀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그 덕분에 우리나라는 경제주의적 사고가 종교적 지위에 올라와있는 천민자본주의 사회가 되었다. 자유도 기업의 자유이지 개인의 자유는 아니며, 개인의 잠재력이 억압되는 구조적 폭력상태가 일상이 되어버렸다. 돈이면 다 된다는 폭력적인 사고가 일상적인 문맥으로 자리잡았으며, 돈 안되는 일은 다 하찮거나 쓸모없는 짓이고, 돈이면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 국가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핵발전소, 송전탑, 대형댐 건설과 같은 국책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회적 갈등도 돈으로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삼척시 원덕읍 옥원리는 삼척시 남쪽, 울진과 맞닿아있는 곳이다. 항공사 광고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진 솔섬과, 지금은 매립된 몽돌해변이 지척에 있고,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그러나 삼척시를 복합에너지 거점도시로 만들겠다는 전임 시장의 토건지향적 정책으로 복합화력발전소, LNG생산기지 등이 옥원리 주변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웃의 울진 핵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보내기 위한 345kV 송전탑이 건설되었고, 화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보내기 위한 154kV 송전탑과 송전선이 다시 마을을 에워싸며 가도록 계획되었다. 송전선에서 나오는 전자파로 인한 건강상의 피해와 마을 경관의 파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색무취인 LNG가스의 누출을 확인하기 위해 암모니아가스를 주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악취,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미세먼지, 무연탄 저장고에서 나오는 분진 등이 주민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온배수에 의한 어족자원의 피해도 걱정거리였다. 이들은 고향을 지키고 자신들의 삶을 보호하고자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밀양이나 청도의 송전탑 싸움처럼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워낙 작은 마을이었고, 다른 사회단체나 환경운동단체들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젊은 이장과 노인들이 대부분인 주민들만의 외로운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연구조사차 삼척시에 갔을 때, 반핵운동을 하시는 분의 소개로 옥원리를 처음 방문했다. 마을 입구에는 손글씨로 ‘송전탑 건설 반대’라고 쓴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고, 한전의 공사차량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길가에 텐트를 치고 할머니들이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분들은 밀양과 청도의 사례를 잘 알고 계셨고, 자신들도 그렇게 싸워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면서도, 그 분들 만큼 그렇게 가열차게 싸울 수 있을지 걱정하고 계셨다. 잠시 동안 그 분들 곁에 앉아 대화를 듣고 있자니 시시콜콜한 집안 걱정거리, 함께했던 즐거웠던 추억들, 자식자랑, 남편 흉보기, 건강에 대한 염려 등이 주된 화제였다. 오래 묵은 된장처럼 구수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들의 바람은 소박했다. 그냥 지금 이대로 살게 내버려 달라는 것이었다. 고향마을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말고, 지금처럼 평화롭게 살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국책 사업을 한다면서 그 대가로 큰 돈을 받게 되면 오히려 공동체가 파괴되고, 인심이 흉흉해지며 마을이 무너져버리는 것을 이미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돈이면 어떤 문제도 다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아니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었다. 어르신들의 투쟁이 꼭 성공하시기를 빌면서 텐트를 나왔다. 

한동안 옥원리 상황을 잊고 살다가 얼마 전 문득 궁금해져 이장님에게 전화를 했다. 이장님의 첫마디는 “저희들 무너졌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삼척시가 중재하여 한전은 송전탑을 원안대로 건설하는 대신, 경로당에 냉난방기와 효도관광을 지원하고,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약속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아마 너무 외롭고 고단한 싸움이 이어지다보니, 이렇게 양보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신 것으로 보인다. 널리 이 싸움을 알리고, 다양한 지원을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앞으로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뭉칫돈이 들어오게 되면 그 훈훈했던 마을공동체가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걱정이 되었다. 전자파와 다른 환경오염 피해도 계속 이어질 텐데, 그 문제들이 돈만 받으면 다 해결이 될 것인가도 걱정되었다.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경제주의적 패러다임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깊어졌다. 경제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경제를 지배하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돈이면 다 된다는 폭력적인 문화를 어떻게 평화의 질서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고민을 하다가 신영복 선생의 <담론>이라는 책에서 경제주의를 벗어난 사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북미 선주민이었던 체로키족의 ‘빈 마차’이야기였다. 미국의 서부개척 과정에서 체로키족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머나먼 인디언보호구역으로 강제이송 되었다. 1838년부터 1만3천명의 체로키들을 차례로 이주시켰는데, 거리가 무려 1,300킬로미터였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1/3의 체로키들이 사망하는 죽음의 이동이었다. 그런데 정부군은 죽은 사람을 매장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사흘에 한번만 매장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죽은 어린아이와 가족을 가슴에 안고 걸어야만 했다. 이 체로키들의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고 불렀는데, 정작 체로키들 중에서 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이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이 행렬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빈 마차’였다. 정부군은 마차와 노새를 타고 가도 좋다고 했지만, 아무도 그 마차를 타지 않았다. 심지어 행렬의 좌우에서 호위를 하던 병사들을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무표정하게 죽은 사람을 안고 걸었던 것이다. 백인 마을을 지날 때 백인들은 마차를 타지 않은 체로키들을 비웃었지만 어느 누구도 비웃는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빈 마차는 체로키들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체로키들은 이런 자존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비장함이 감도는 숭고함과 인내심, 그리고 햇살보다 더 찬란한 자존심을 어떻게 지니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가설이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경제주의적 사고라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 그 속에서 함께 행복을 추구하며, 관계망에서 분리된 ‘개인’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먹고 살기 위해 상품으로 노동력을 팔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공동체 속에서 문화를 가꾸어 왔기 때문에 이토록 강인한 자존심을 모두가 갖게 되지 않았을까? 먹고 사는 문제는 공동체를 건실하게 유지하면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에 구차해질 필요도 없고, 자연과 우주의 원리에 충실하며 의연한 삶을 살아가는 문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경제주의를 벗어난 사회는 우아한 자존심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그런 사회일 것이다. 

물론 체로키족은 무너졌고, 그런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며 다시 경제주의라는 폭력을 들이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폭력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바로 이런 자존심을 세워주는 사회가 아닐까?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 과정에서 무너진 옥원리 할머니들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드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새로운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옥원리 할머니들의 따뜻한 수다가 그리워진다. 더 늦기 전에 찾아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