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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 칼럼
기본소득, 본질은 정치적 의지

“1%의 거대자본이 가진 부를 99%의 대중들에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버니 샌더스의 일성만큼 통쾌한 사이다가 또 있을까? 공립대학 무상교육, 남녀 차별 없는 평등임금, 최저임금 인상(시간당 15달러), 거대 은행 해체. 듣는 것만으로도 쾌감을 느낀다. 사회․경제 불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해법을 제시하며 그는 미국 대통령 선거의 중심에 섰다. 당락과는 무관하게, 그는 민주당의 사회․경제정책을 조금씩 왼쪽으로 옮겨놓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버니 샌더스는 정치적 영웅이다. 그의 당당한 주장이 한국사회가 처한 현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 조사 대상자의 88.8%가 “경제적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답한 국가미래연구원의 조사결과(2014.11)나 비슷한 시기에 90%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빈부격차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는 결과를 발표한 한국 갤럽의 조사는 경제 불평등이 심각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몇몇 우울한 사회∙경제 지표들이 있다. OECD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노동시간 1위, 노인빈곤률 1위, 저임금 노동자 비율 1위, 청년실업률 9.2%(체감실업률 22.4%), 소득과 부의 평등지수 최하위, 자산 하위 50%가 단지 2%의 부 보유, 월 소득 77만원(중위소득 50%) 미만의 빈곤인구가 824만 명. 이러한 통계는 저임금∙불안정노동, 절대적이며 상대적 빈곤과 불행, 희망이 없는 불안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불가피하게 전환이 필요한 시대다. 모두가 금수저를 가질 수는 없어도, 흙수저에 붙은 흙이라도 떼 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돌파할 방법은 없을까? 미국 알래스카 주의 기본소득은 우리에게 두 가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첫째, 알래스카 주는 1982년부터 ‘영구기금배당’이라는 제도를 도입해, 주민들에게 석유로부터 나온 수익금을 배당한다. 생태가치의 기준에서 ‘석유’는 정의롭지 못한 매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석유라는 ‘공유재’의 수익을 주민들이 공평하게 나눈다는 것이다. 석유가 발견되기 전부터 알래스카 헌법은 “토지와 자연자원에 대한 공동소유권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석유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공유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는 소액이지만, 2008년부터 탄소세를 걷어 일부를 주민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공유재에서 나온 수익을 나누자는 아이디어는 몽상가들의 백일몽만은 아니다.

 

둘째, 알래스카 주가 미국에서 가장 경제 불평등이 작은 주이면서, 빈곤율이 최하위 수준이라는 점이다. 매년 지급되는 배당금이 일정하지 않지만, 많게는 1인당 3,200달러를 지급하기도 한다. 3인 가구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나라 금액으로 연 1천만 원이 넘는 돈이다. 다른 주에 비해 경제적 불평등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영구기금배당’이 알래스카를 미국에서 가장 평등한 주로 만들었듯이, 기본소득이 구현된 사회는 지금보다 경제 불평등이 완화될 가능성이 크다.

 


알래스카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지만, 기본소득을 바라보는 세계의 최근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핀란드 정부가 기본소득 정책 도입을 검토한다는 최근의 언론보도는 온라인을 들썩이게 했다. 사회보장체제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두고 볼 일이지만, 20세기 경제성장 패러다임에서 출발한 복지국가모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네덜란드도 전환의 기운이 감돈다. 네 번째로 큰 도시인 위트레흐트를 비롯해 19개 지방정부가 기본소득 정책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사회보장급여 수급자들은 기본소득 외에도 노동을 통해 얻는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될 예정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남부 아키텐주 의회와 캐나다 온타리오주 킹스턴시 의회는 최근에 기본 소득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스위스는 올 6월, 기본소득을 헌법에 명시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결과에 따라 국가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나라에 앞서, 브라질은 이미 10여 년 전에 ‘시민기본소득법’을 국회가 통과시켰다. 재원의 문제로 전면적으로 시행하진 못하지만, ‘보우싸 파밀리아’라는 정책을 통해 점진적으로 실행해나가고 있다.

   

 

기본소득은 우리에게도 낯선 정책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조건 없이 매월 20만원의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선에도 영향을 끼친 공약이다. 애초 약속보다 상당히 후퇴하여 현재는 노인의 70%에게만 지급한다.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성남시 청년배당은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보건복지부가 이 정책을 불수용하면서 지급액이 줄어들긴 했지만, 연 100만원을 지급한다는 것이 성남시의 계획이다.

 

국내외 다양한 흐름은 우연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다. 1972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이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걸 정도로 논의의 역사는 꽤 길고 깊다. 현재 많은 수의 OECD 국가들이 기본소득 정책을 만지작거리는 이유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실업자와 비정규직 문제의 심화를 그대로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연계 복지패러다임에서 새로운 대안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소득불평등을 줄이면서 빈곤을 해소하고, 공유재로부터 나오는 수익을 윤리적으로 사용하며, 온실가스배출을 억제함으로써 기후변화 문제에도 기여하는 기본소득을 배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모든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주거권 정책 등과 병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기본소득을 당론으로 채택한 녹색당도 현재의 여러 복지정책과 병행하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매월 40만원을 제시한다. 낭비 예산을 줄이고 보편증세와 생태세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을 우려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재원마련방안에 의구심을 갖는다. 조세 저항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보편증세는 난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재원과 관련하여 분명한 것은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우리나라 추가복지 재정잠재력은 기본소득을 실시할 만큼 충분하다는 것이다. 본질은 재원이나 대중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정치적 의지다. 정글 속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생존의 시대에,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 적어도 우리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라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비빌 언덕이 존재해야 한다. “취지는 좋으나 가능하겠는가?”라는 자기검열을 통해 기본소득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논의 테이블로 끌어올려야 한다. 4.13 총선에서 기본소득을 대표 공약으로 내건 녹색당의 실험을 주시하는 이유다.

 

※ 이 글은 프레시안 ‘초록발광’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