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전환연구소 로고
알림 - 칼럼
알려주는 것, 알고싶은 것, 알아야할 것

출근길에 받은 한 장의 명함에는 자신이 낡은 정치를 바꿀 적임자임을 어필하는 한 줄 문구와 함께 (예비)후보자의 이력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9cm*5cm 남짓 한정된 공간에 담겨 나에게 전달된 그 정보들은, 하지만 딱히 나의 눈길을 끌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개 선거 명함이란 비슷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기 마련이므로. 어느 학교를 나와 지금껏 어떤 일/활동을 해왔다는 것, 그리고 출사표와 같은 짤막한 카피. 하지만 ‘유권자와의 소통’이라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별다른 효용 없이 이내 버려진다는 운명 또한 대개는 비슷하다.

 

사무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창을 열었을 때도 포털사이트 메인화면 뉴스란에 빠지지 않는 핫이슈는 단연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움직임. 인물 동정과 선거 대진표, 여론조사 결과 따위를 시시각각 전하는 뉴스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다. ‘알려주는 것’들을 소비하는 시간. 마치 스포츠 중계와도 같은 선거뉴스 보도는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마치 이런저런 취미 가운데 하나처럼 만들어놓는 듯 보인다. 응원하는 팀(정당)과 선수(후보)가 있는 이들은 흥미진진하게 관전하지만 한편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그들만의 리그’, 관심 밖 영역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본다 해도 주어진 뉴스와 정보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알고 싶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적잖이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애써 그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내 삶이 더 나은 것으로,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는 많은 이들은 여전히 채널을 돌리듯 정치에서 멀어지고 있다. 한 신문기사에서는 한 해 예산을 유권자 수로 나누어 1표당 3,517만원이라는 금전적 가치를 산출해내고 이 권리를 남에게 거저 넘기지 말 것을 주문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투표라는 가장 강력한 권리마저도 눈에 보이는 수치로 계량화하지 않으면 체감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삶과 사회를 바꾸는 많은 결정들이 정치면 기사에 가려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 이루어지는 사이, 진짜 ‘알아야 할 것’들은 얼마나 잘 전달되고 있을까.

 

 

“모여라, 말하라”

 

얼마 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이들끼리 ‘협의회’를 꾸렸다. 보다 주체적으로 일하고 민주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우리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도 치렀다. 출마의 변을 듣는 자리에서 후보자에게 말이 너무 많다 타박하는 농담도 했지만, 그동안 너무 협소했던 만남의 자리, 모자랐던 ‘말’을 충분히 하는 데 과함이 있을 리 없다.

 

준비 과정과 이후에도 가장 공들이는 일은 모이고 말하도록 하는 것, 그 과정이다. 결정해야 할 것의 범위와 방식과 구체적인 내용을 정하고 묻고 대답을 기다리는 일. 하나하나 논의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때로 조금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꼼꼼히 살펴야 할 게 많아 급기야 책임 있는(?) 분들이 알아서 잘 정해 주었으면 하는 그야말로 ‘무책임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공동의 일터와 노동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협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충실히 해 나가는 것만으로 생겨나는 크고 작은 변화를 본다. 알고 싶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고, 알아야 할 것을 모자람 없이 알려주는 일. 어디에도 보도되지 않지만 우리 일터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우리 안의 작은 정치가 조금씩 성숙해가고 있다.

 

비단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여러 모임에서, 두루두루 모이고 말하는 속에서 생각과 생각이 만나고 부딪히며 다듬어진다. 어느 땐가 ‘요즘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을 주제로 이야기하던 한 모임 자리에서 누군가는 시도 때도 없이 눈에 들어오는 스크린광고 모니터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나 역시 눈과 귀를 어지럽게 하는 영상광고, 게다가 ‘쓸데없이’ 한밤에도 불을 밝혀 놓는 간판 조명 따위가 못마땅했던 터에 그이가 던진 화두가 줄곧 마음에 남았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록 아주 조그마한 성취더라도.

 

그래서, 행여 빈말이 난무하는 정치, 자리와 권력을 지키는 데 급급한 정치에 또 실망하고 좌절하게 될지라도, 정치의 본질이 ‘만나고 대화하는 데 있는 것’임을,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는 것’임을 기억하기로 한다. 그것은 알고 싶은 것을 묻고 알아야 할 것들이 막힘없이 공유되는 속에서 나온다. 다가오는 선거일에 ‘3,517만 원짜리’ 권리를 행사한 뒤에도, 위임한 권리를 나몰라라 하거나 ‘알려주는 것’만을 소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좀더 부지런한 시민으로 살아야 할 이유다. 우선은 밤에도 환하게 밝은 동네 중학교 간판 조명을 바꿀 수 없는지 묻는 일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