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전환연구소 로고
알림 - 칼럼
공기청정기로 만족할 수 없다면

어느 계절보다 좋은 봄날씨에, 나가 놀고 싶은 아이들도 산책과 야외활동을 즐기는 사람들도 별 수 없이 실내에 갇혀버렸다.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의 공습을 당했거나. 거리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모습이 다시 익숙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지난해 메르스 사태 이후 마스크 판매량은 다시 ‘급증’했다는 소식이다. 두고두고 쓸 수도 없어 매번 구입하는 값이 적잖은 부담이다.

 

여름을 앞둔 시기까지도 사그라들 줄 모르는 미세먼지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그 틈을 타고 공기청정기가 사계절 필수 가전으로 ‘등극’했다는 또 하나의 소식. 급성장하는 공기청정기 시장은 올해 1조 원을 내다보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발표된 환경성과지수(EPI)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대기질 점수는 조사대상 180개국 가운데 무려 173위라는데, 그것이 ‘공기청정기 판매 폭발 이유’라는 기사의 전개가 못내 씁쓸하다.

 

비 오고 해 뜨는 날씨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저 순응한다 하더라도, 매일같이 ‘나쁨’을 말해주는 미세먼지 예보에조차 마스크를 챙긴다거나 큰 맘 먹고 공기청정기를 들이는 것으로 자기방어를 하고 불안을 달래는 것 외에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이 미세먼지에 노출된 개인들이 느끼는 무력감이 아닐까. 정부의 ‘종합대책’은 요즘 하늘마냥 뿌연데, 난데없이 고등어구이가 미세먼지 주범으로 몰리면서 애꿎은 어부들만 울상이다.

   

 

위험이 존재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일본 3.11 원전사고 이듬해인 2012년, 자체 취급 먹을거리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면서 조합원으로 있는 생협에서는 긴 토론이 벌어졌다. 핵심은 ‘불검출’을 원칙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관리기준을 정해 그 이하에서 취급할 것인가였다. 결국 국가 기준치와 별도의 독자 기준을 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는데, 그와 더불어 기억에 남는 것은 ‘이미 방사성 물질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나 홀로 ‘거부’할 수 없는 일이고, 그렇기에 그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 일본산 수산물 수입과 원전 가동에 반대하는 한편 햇빛발전을 통한 지역 에너지 자립 모색 등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탈핵운동의 주요한 한 동력은 그런 마음들이었다.

 

우리집 밥상에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은 먹거리를 올리는 일, 말하자면 집안에 공기청정기를 들이는 정도의 대안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들 중 누군가는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주변 공간의 안전을 직접 확인하고 그 정보를 공유하고자 했다. 위험이 존재하고 해결책은 아직 충분치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이후 학교급식의 방사능 기준치를 낮추는 등의 실제적인 성과도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최근에는 크라우드펀딩으로 미세먼지 측정기를 만들고 미세먼지 지도를 공유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하나의 사업 아이템이면서 동시에 아이들에게 미세먼지 없는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다. 기본적으로 국가 예보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낮기 때문이지만, 스스로 해결 주체가 되기 위한 ‘저항과 창조’의 행위로 읽히기도 한다.

 

이미 시중에 유통되는 먹을거리들이 방사성 물질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삼시세끼 집밥이 대안이 될 수 없듯, 미세먼지 예보가 ‘아주 나쁨’이더라도 공기청정기와 함께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 없는 노릇. 어디서든 마음 놓고 숨 쉴 권리가 누구에게나 주어지길 바란다면 무기력한 개인으로만 머물러서도, 바깥 세상에 책임을 돌리는 데에만 전력하는 일도 충분치 않은 것 같다. 다시 ‘저항과 창조’의 이중주를 떠올린다.

 


 

'미니멀‘의 시대, 필요를 갖추는 방법

 

쾌적하고 편리한 생활환경을 유지하는 데 ‘필수’라는 가전 목록은 하나둘 늘어가고, 살균제 파동에도 불구 가습기 시장 역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개인적 경험을 떠올리면, 가급적 물건에 덜 신경 쓰며 살고 싶었던, 요즘 말로 ‘미니멀’한 삶을 꾸리는 데 몰두했던 시절, 누군가 선물로 준 가습기를 마음만 덜어내고 돌려준 적이 있었다. 건조함을 해소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본 것은 그 덕택이었다. 젖은 수건을 걸어놓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면 보다 창의적 대안으로 꼽을 만한 것은 최근에 알게 된 꽃 모양의 ‘수제’ 부직포 가습기인데, 미적 감각까지 더해진 모양과 쓰임에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어쩌면 소비로 해결하는 편리함에 익숙해 잊히고 있을 ‘보다 좋은 방법’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첨단기술이든 소박한 손재주든 중요한 것은 그 필요와 목적의 ‘적정함’이라는 것도. 무엇보다 공해의 덕을 보는 제품들 혹은 ’녹색‘으로 포장돼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을 해결책으로 제시받거나 그것을 또 다른 성장 동력으로 삼는 것은 썩 반갑지 않은 일이니까.

 

그 와중에 ‘필요’와 ‘여백’에 보다 집중하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사람들 또한 최근 부쩍 느는 것 같다. 마치 ’버리기 경쟁‘처럼 보여주는 측면이 부각된다는 지적도 있지만, 저성장 시대, 어쩌면 다가올 성장 이후 사회에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이 조용히 공감을 얻는 듯 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계절은 돌고 돌아 이제 곧 제습이 절실한 장마철이 온다. 가습기 못지않게 최근 몇 년간 판매량이 ‘급성장’했다는 제습기, 그 시장을 더욱 확대하려는 업계의 광고도 요란해질 것이다. 이처럼 생활의 필요를 소비하라 부추기는 목소리는 ‘미니멀’의 유행에 아랑곳없이 계속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필요를 잘 따져보고 스스로 혹은 협동의 방식으로 만들어 가는 소식들을 더 부지런히 소문내야 할 것 같다. 경제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값을 덜 치르며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숨은 지혜와 창의적인 생각들이 여기저기서 발굴되고 공유되기를. 그것이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현명함일 거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