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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옹색한 논리,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다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사업을 겨눈 악의적이며 모순적인 정부의 칼날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시대마다 두드러진 청년의 고뇌가 있다. 민주화를 갈망했던 청년의 시대가 있었고, 먹고 사는 문제와 직면한 청년의 시대가 있다. 청년의 고뇌는 여느 시대나 존재했고, 다양하게 병립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조건은 다를 수 있어도 고뇌의 경중은 따지기 어렵다. 민주화를 갈망했던 청년이 먹고 사는 문제에 천착하는 청년보다 더 고차원적인 고뇌였다고 평가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먹고 사는 문제만큼 치열한 삶의 투쟁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에게 놓인 지금의 시대가 그렇다. 과거만큼 고성장의 경제 활황을 기대하거나 일자리가 획기적으로 창출되리라고 기대하는 이들은 적다. 우리는 가진 사람들이 현재보다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안다. 국가가 개인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함은 현실이 됐다. 모두가 각자도생의 길 위에 서 있다. 내 이웃과 공동체, 심지어 가족도 나의 생존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목도하는 많은 청년들은 이를 가리켜 ‘헬조선’이라 부른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비하할 목적으로 신조어를 확산시킨다고 믿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심을 조롱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긍정의 힘을 강조하기 위한 계몽적 표현이라고 양보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청년에게 놓여 있는 불안정한 미래가 박근혜 대통령이 8.15경축사를 통해 요청한 “도전과 진취, 긍정의 정신”을 되살린다고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소득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언제나 약자의 삶부터 피폐해진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청년들도 직격탄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고뇌를 덜기 위해 국가와 정부가 존재한다. 일자리를 위한 사회 인프라를 늘리고 기업에게 고용증대 압박을 넣고 취업성공패키지와 같은 정책들을 정부가 내놓는 이유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따로 있을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이기 때문이다.


“현금이 개인적 활동에 사용되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

지난 8월 2일, 국무회의에서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사업>을 두고 정진엽 보건복지부장관이 한 말이다. 청년수당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사업은 사회참여의지가 있는 만19~29세 미취업 청년 3,000명을 경제․사회적 지표로 선발하여 사회참여활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매월 50만원씩 최장 6개월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정진엽 장관의 이 발언은 공공복지 서비스가 현금으로 지급되는 것에 대한 강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 발언이 얼마나 모순된 논리인지 몇 가지만 짚어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시절 65세 이상 노인에게 매월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고, 현재 70%의 노인에게 20만원의 현금을 지급한다. 내가 아는 한, 이들 노인들은 생활비와 같은 개인적 활동에 사용한다. 그러나 아무도 65세 노인들에게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고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양육수당이라는 제도가 있다. ‘아이행복카드’로 결제되는 보육료 지원은 차치하더라도, 보육서비스를 받지 않는 84개월 미만 아동들에게 매월 10만원에서 20만원까지 양육수당이 지급된다. 현금으로 지급되는 이 사업은 정진엽 장관이 직을 맡고 있는 보건복지부의 핵심적 보육사무다.

나라마다 제도가 달라 일률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주당 한화로 9만원을 지급하는 스웨덴의 학생수당, 월 57만원을 지급하는 노르웨이의 학생수당, 월 42만원을 지급하는 핀란드의 학생수당, 월 42만원을 지급하는 독일의 학생수당(심지어 독일은 자녀가 있는 25세까지의 청년에게 자녀수당을 지급한다)은 모두 현금지급이다. 이들 나라들은 대학등록금도 없다. 정진엽 장관의 말이 옳다면, 이들 나라들은 도덕적 해이로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은 우리나라보다 행복도가 높다.

공유재를 시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미국 알래스카 주지사 제이 헤먼드는 ‘알래스카 영구기금’을 통해 기본소득을 구현한 첫 번째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현금으로 배당한다는 아이디어를 도입한 것은 아니다. 어업자원으로 얻은 이익을 세액공제의 형태로 시민들에게 혜택을 제공했지만, 결국 그는 “세금이 공제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배당 프로그램을 또 만든다면 이번에는 모든 사람의 손에 돈을 쥐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알래스카 영구기금’을 통한 기본소득은 그렇게 실현됐다.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다수의 중산층을 지탱하는 데는 배당이 세액공제보다 낫다는 것을 제이 헤먼드는 다양한 정책 실험을 통해 체득했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은 ‘자원의 저주’에 갇힌 나라들에게 알래스카 기본소득 모형을 적용하자고 제안한다.(<시민배당>, 피터 반스, 2016)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그렇지 못한 나라에 비해 더 권위주의적이고 부패한 경향을 보이는 현상을 가리켜 ‘자원의 저주’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들에게 직접 현금을 제공하는 것이다. 실제로 선별 복지에 드는 행정비용과 대규모 구호사업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안하면 직접 현금지급이 더 효과적이며 효율적이라는 연구도 많다.


“월 20만원, 최대 3개월간 취업알선단계의 청년에게 현금을 지급하겠다”

지난 8월 12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내용이다. 현금으로 지원하는 성남시 청년수당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사업을 강하게 비판했던 정부가 현금지급 카드를 내밀었다. 사실, 정부의 대표적인 청년정책으로 잘 알려진 <취업성공패키지>도 현금을 지급 안 한 것은 아니다. 1단계 진로상담에는 최대 25만원, 2단계 훈련과정에는 6개월에 한해서 40만원을 지급했다. 이번에 발표한 것은 3단계 취업알선단계에서 최대 6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의지였다.

고용노동부는 서울시 청년수당은 예산으로 지급하는 반면, 취업성공패키지는 민간재원으로 운영한다며 차원이 다른 정책이라는 보도자료를 냈다. 그 동안 정부가 ‘현금지급’이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 것을 생각하면 옹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다. 스스로 서울시와 성남시에 내밀었던 칼날의 본질이 현금지급이기 때문이다. 이제 정부는 그 칼날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서울시의 청년수당과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확실히 이 시대의 논쟁적 화두다. 전자는 선별성을 띄고 후자는 보편성을 띈다. 가구소득, 부양가족 수, 경제․사회적 여건 등의 1차적 정량평가를 거쳐, 제출된 지원신청서에 대한 2차 정성평가를 통해 최종 3,000명을 선발하는 서울시는 성남시 청년배당보다 복잡하고 무겁다. 정보의 접근성도 모든 청년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루 하루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이 정보를 쉽게 얻긴 힘들다. 지원서를 누가 더 잘 쓰느냐에 따라서도 결정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성남시의 청년배당을 더 선호한다. 만약 정부가 이런 관점에서 서울시 청년수당을 비판했다면, 나는 응당 정부 논리를 지지했을 것이다.

정부는 서울시 청년수당에 대해 직권취소 명령을 내렸고, 이에 맞서 서울시는 대법원에 취소 소송과 집행정지 신청을 했다. 청년정책이 대법원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슬픈 일이지만,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하든, 이 논쟁은 멈춰서는 안 된다. 앞으로 보편적 현금지급(기본소득)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는 더 늘어날 것이고, 불가피하게 우리는 이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회피하지 말고,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