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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 칼럼
고양이와 같이 살아도 될까?

휴가를 떠난 친구의 부탁으로 2주간 고양이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건물 지하에 혼자 남겨져 있다 구조된, 태어난 지 두 달 남짓 된 (것으로 짐작되는) 작은 ‘냥이’였다. 하지만 몸집의 크고작음에 관계없이 실내에서 동물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낯설고 그래서 약간은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동물을 좋아하지만 함께 살 수는 없겠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렇게 조금은 자신 없이, 그저 운명처럼 찾아온 인연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고양이와의 짧은 동거를 시작했다.

지금껏 살면서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 ‘생물종’에 대해 당연하게도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려준 대로 화장실 모래를 갈아주고 밥과 물을 챙겨주는 일은 어렵지 않게 하더라도, 고양이가 내는 소리와 행동에 담긴 뜻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만족스러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후에 알았을 때 얼마나 신기하고 또 안도했는지. 자꾸만 손과 팔을 깨무는 고양이의 행동은 이해와 교정은커녕 방어하기에 급급했지만.

그렇게 예정한 2주가 무사히 지나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이 ‘묘한’ 동거생활은 무기한 연장되었다. 결정을 내리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주변 지인들과 나 스스로 던지는 몇 가지 물음들에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1인가구인 데다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고 이따금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하는 나의 생활패턴에 반려동물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누군가는 신중한 결정을 당부했다. 독립적이고 혼자서도 잘 지내는 동물로 알려져 있지만, 가족도 친구도 없이 좁은 집에서 혼자 있어야 할 어린 고양이는 내내 마음이 쓰이는 존재였다. 귀가 시간이 조금 빨라진 것은 그 덕분. 그 밖의 여러 변화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것인데, 어쨌거나 공간을 함께 쓰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은 곧 삶의 일부분을 내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고양이는 온몸으로 알려주었다.


고양이에게 좋은 삶이란 무얼까

함께 사는 고양이의 건강을 생각하고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애묘인들이 많아지는 데 발맞춰 고양이의 먹을거리 또한 날로 진화했으리라는 것은 짐작대로였다. 최고급을 표방하는 사료의 성분은 사람의 먹을거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배변처리용 모래 가운데서도 ‘친환경’ 표기를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위생과 놀이를 위한 다채로운 용품들도 필요한 만큼 혹은 그 이상 갖춰져 있었다. 개중에 가능한 좋은 것을 구입하는 것으로 고양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고양이 쇼핑몰을 드나드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런데, 그것이면 충분할까?

이전에 몇 년간 고양이들과 살던 지인은 고양이 용변을 처리하며 폐기물(모래)을 쓰레기로 배출하는 일과 그네들의 본성을 거슬러 실내에 가두어 키우는 일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것이 이따금 찾아오는 ‘냥이’들에게 밥 주는 일을 계속하면서도 더 이상 집고양이로 들이지 않겠다는 이유였다. 실은 외면하고 싶었던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그렇게 맞닥뜨렸다. 고양이와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 생태적으로 바람직한 선택인가를 묻는.

하지만 이미 인간들의 생활양식에 최적화된 대부분의 도시 공간에서 많은 고양이들이 ‘불법체류’ 신분으로 전락한 지금, 길에서 짧은 생을 마감할 고양이를 모른 척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어쩌면 내가 이미 정해놓고 있던 답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양이의 생에 간섭하고 책임지기를 택했다.

고양이가 조금 더 자라 옥상 난간에 올라갈 수 있게 된 뒤로는 나가려는 고양이와 붙드는 나 사이 눈치싸움이 반복되었는데, 더운 여름날에도 문을 열어두지 못하는 나를 두고 누군가는 ‘극성 엄마’에 빗대기도 했다. 하지만 거꾸로, 문을 열어주는 일은 자율과 무책임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보였다. 결국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디까지일까’라는 또 다른 물음이 앞에 놓였다.


‘정답’을 말할 수는 없지만, 고양이 혹은 어떤 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은, 모든 생명은 존귀하고 따라서 존중해야 한다는 당위적 입장에서 더 나아가 보다 구체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던져지는 질문들에 대해 저마다 내놓는 답이다. 더구나 애묘와 혐묘가 위태롭게 공존하는 현실에서, 적어도 동물과 관계 맺는 방식(나 역시 지금껏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다수가 공감하는 정답에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고양이는 이따금 과격하게 문다. 여름내 노출된 팔은 늘 상처투성이였다. 그런 고양이의 언어를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그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집안에서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은지는 여전히 궁금하고 묻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면 지금의 관계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애교를 부리고 애정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조건 없이 보살피고 함께 살아가는 것. 상처를 내고 ‘말썽’을 일으켜도 밥을 챙겨주는 일. 흘러간 유행가 가사처럼 이 사랑은 말 그대로 '무조건‘이라는 것이 내가 정해놓은 또 하나의 답이다. 저마다 조금씩 다른 답을 인정하더라도, 휴가철을 맞아 유기동물이 급증했다는 매해 반복되는 기사를 보고 있자니 명백한 오답 정도는 걸러졌으면 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