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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 칼럼
불평등한 사회의 과학기술 윤리

해가 바뀌었어도 광화문 광장의 촛불 파도는 여전히 넘실거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생명을 던져 소신공양을 하신 스님도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스님께서 남기신 유지가 온전히 펼쳐지기를 바래본다. 박근혜 퇴진이라는 구호로 집약된 시민들의 불만과 요구 사항은 다양하겠지만, 핵심은 불평등한 사회 시스템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특권과 특혜가 판치며, 기회가 불공평하게 배분되고, 기득권은 더 강화되며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폭력적으로 관철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소득 불평등은 매우 심각해서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이 45%나 되고, 상위 1%가 소유한 부가 전체 부의 18%를 차지한다. 이처럼 불평등한 구조는 사회 전체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한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이 일종의 지대추구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함으로써 이러한 불평등 구조를 더 심화시켰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삼성생명-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이 손해를 보면서도 승인을 하도록 손을 써서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도와준 혐의가 드러났다. 심지어 메르스 사태 때 책임이 커서 감사원마저도 상응하는 처벌이 필요하다고 했던 삼성의료원이 아직도 처벌받지 않고 있었던 것도 드러났다. 대기업, 특히 삼성의 특혜를 위해 청와대가 나서서 도와주고 또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정치-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두어서는 사회정의가 실종될 뿐만 아니라 소수 특권층이 대다수의 대중을 억압하는 특권층 중심의 귀족사회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아니 이미 등장한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고대 이집트 왕국처럼 오직 파라오 한 명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온 백성들이 동원되어 몇 십년동안 그저 무덤일 뿐인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드는 노역에 동원되는 그런 사회가 나타날 수도 있다.

 

특권층 중심의 귀족 사회에서는 공공성,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의 가치들이 사라지고 특권층들의 취향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의 진행 방향이 결정될 수도 있다. 특히 무서운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과 특권층의 관계이다. 미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소수 특권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과학기술 패러다임 변화에 특권층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부상하고 있는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등의 과학기술은 특히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재 양극화되고 불평등한 세계질서를 완화하기 보다는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의 급속한 발전은 노동시장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추월해버림으로써 단순히 일자리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직종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경기에 따라 실업률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아예 구조적인 실업이 정착됨으로써 절대 다수의 사람들을 노동시장에서 퇴출시키게 된다. 이들이 담당했던 수많은 기능들은 로봇과 같은 기계 시스템이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제 수많은 잉여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식량과 주택은 어떻게 확보하고 아이들은 어떻게 키울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기본소득의 도입과 같은 사회경제적 대책들이 논의되고 있다. 의미심장한 사회적 고려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인공지능과 로봇공학 기술이 점차 자율성을 갖기 시작하면서 위험하고 통제되기 어려운 국면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데이터를 입력해주고 설계해 준 알고리듬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계 스스로 학습을 하면서 통제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하게 되면, 재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신용카드 수백만 장을 무효화시킨다든지, 주가가 폭락 혹은 폭등한다든지, 원자력 발전소 운영 시스템을 마비시켜 제2의 후쿠시마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은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처 손쓸 틈도 없다.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위험에 대해 간단히 ‘시스템 리스크’라고 명명했지만, 어감처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재난의 규모가 심대하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실존적인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 얼마 전 모방송국에서 방영한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전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시스템 리스크’의 윤리적 딜레마를 가상 시나리오를 통해 잘 보여주었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인간을 살해한 로봇을 경찰이 취조하면서 왜 살인을 했냐고 물었다. 로봇은 그 사람이 치명적인 전염병을 가진 환자이기 때문에 병원에 있는 204명의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살인을 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그 사람을 살리고 다른 환자도 살리는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고 타일렀지만, 로봇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해결책이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경찰이 그래도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것이라고 다그치자, 로봇은 혼란스러워하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대단히 모순적이고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로봇이 인간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었다. 다소 과장된 측면도 있지만, 자율성을 가진 인공지능 시스템이 초래하는 ‘시스템 리스크’의 윤리적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것은 아니지만 최근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자율주행 자동차의 경우도 윤리적인 딜레마가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탑승객을 보호하기 위해 도로에 있는 개를 칠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동물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는 개가 아니라 노인과 어린아이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합리적인 선택은 어떤 것일까? 더 나아가서 만일 자율주행자동차가 순식간에 차 앞에 있는 두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하여 노인이 매우 부유한 저명인사라는 사실과 어린 아이가 매우 가난하지만 영재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설사 이것이 과도한 설정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이 과학자의 윤리 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윤리에 대해 심각하게 사회적 논의를 해보아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동시장을 붕괴시키고, 사회적 양극화를 첨예화시키며, 인간의 존재 의의를 의문시 하는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의 발전은 분명히 우리에게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로봇이냐, 착한 로봇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공지능의 발전에 사회가 어떻게 개입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토론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의 발전이 소득불균형을 완화하고 특권층이 아닌 모든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급격한 기후변화의 시대에 자연 생태계과 사회의 복원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인공지능이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가?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이 변화시킨 노동시장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 노동과 고용의 의미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잉여 노동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의 발전을 규제해야 하는가? 어떻게, 누가 규제해야 하는가?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의 발전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윤리의 범주를 창조적으로 확대해야 하는 거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몇 달간 광화문 광장에서 보여주었던 직접 민주주의의 역량은 단순히 정권교체나 정치개혁만이 아니라 이러한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문제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진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크게 쉼호흡 하면서 멀리 내다보고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