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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 칼럼
1인분의 살림

농부이고 주부였던 엄마는 늘 2인분 이상의, 많게는 6인분의 살림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자기 자신에 더해 누군가의 의식주를 끊임없이 돌보고 살펴야 하는 일에서 유일하게 해방될 수 있었던 시간은 환갑을 넘겨 친구 분들과 떠난 여행 정도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쌀을 씻고 밥통의 버튼 조작법을 익혔던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늘 차려져 있던 ‘엄마밥’이 없이 남매들끼리 살게 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살림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고 느슨한 원칙과 눈치싸움 속에 아슬아슬하게 현상 유지를 해나갔던 정도였다. 하지만 적어도 음식재료들을 다듬고 보관하는 법, 부엌살림을 정돈하는 방법 따위를 일러주는 엄마의 시선이 오빠들보다는 내 쪽을 자주 향했다고 기억하는데, 나중 언젠가 더 큰 살림을 능숙하게 꾸려가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지만 이미 다른 시대를 살았던 나의 마음엔 별 수 없는 저항감이 일었었다.

그런데 더 이상 가족과도 친구와도 지내지 않게 된 1인 세대로 진입했을 때 1인분의 밥을 하고 그만큼의 살림을 버겁지 않게 살아낼 수 있게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어느 정도 나의 몫으로 받아들였던 덕분이었던 것 아닐까 하고 이제와 생각해본다. 혼자 살아가는 데 있어 소소한 살림법을 터득하고 익히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서다. 둘, 혹은 셋 이상이 되더라도 저마다 자기 몫의 살림노동을 담당하는 것은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덕목이 되었으니, 그런 배움이 누구에게나 더욱 쓸모 있어질 것임은 분명하다.

 

1인의 삶

바야흐로 1인의 시대. 만혼이나 비혼, 독립, 사별 등 다양한 이유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살아간다. 1인가구는 하나의 현상을 넘어 가장 흔한 세대구성이 되었다.1) 그런데도 여전히 혼자 살아가는 생활은 종종 자취와 같은 일시적인 상태로 여겨지거나 당연히 서툴고 어딘가 미완성인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매 끼를 대충 때우듯 본격적인 살림을 언제까지고 유예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독립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까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살림노동의 일감과 그에 들어가는 시간에 적잖이 놀라게 될 것이다. 화장실 변기가 하얀 색을 유지하고 창틀이 검은 먼지로 뒤덮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주기로 손을 대야 하는지 같은 것들을 하나씩 알게 되는 시기를 지나면, 자기만의 기준이 생겨난다. ‘혼삶’의 장점이라면 그렇게 스스로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면 된다는 점이다. 개인마다 대사량과 식사량이 다르듯 1인분의 살림이라는 것에도 정해진 기준이나 수치보다는 권장량 혹은 최소 기준 정도가 제시될 뿐이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럿이 각기 다른 메뉴를 주문해 나눠먹을 수 없는 것처럼 각자 잘하고 덜 싫어하는 정도를 감안해 분업할 수 없고 모든 일이 나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부담이 늘어나는 만큼, 1인가구를 타겟으로 하는 가사대행 서비스 또한 O2O시스템을 장착해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임으로써 성장을 꾀하고 있다. 한두 가지, 혹은 한두 시간 분량의 살림을 ‘주문’하는 시대. 그렇게 살림으로부터 해방되어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다는 건 분명 누군가에겐 반가운 일이겠으나, 그것으로 온전히 대체될 수 없는 무언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1인분의 밥, 1인분의 노동

가사노동으로 대표되는 살림노동의 가치는 여전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만, 일찍이 80년대 중후반 무렵 주부들의 살림이 갖는 의미는 사회적으로 새롭게 조명되었다. 농약과 각종 위해요소로부터 안전한 먹을거리로 밥상을 차리고, 청소와 빨래에 합성세제를 사용하지 않는 일, 폐식용유를 모아 비누를 만드는 등의 활동들은 나와 자연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각한 주부들의 실천이었고, 이는 생활환경운동으로 이어졌다. ‘살림’은 곧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일’이라고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했을 때, (비록 전통적인 성별 분업의 틀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 일은 가정 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생활 속에서 세계를 바꿔가는 행동으로 재해석되었다.

30여 년이 흐르고, 살림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주부의 수가 줄어든 대신 가사일의 많은 부분이 상품화되었다. 1인가구가 늘었고, 2인 이상 가구에서는 가사의 적절한 분담을 둘러싼 해법이 절실해졌다. 변화된 사회 환경과 조건 속에서 살림은 여전히 ‘살리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얼마 전 생협에서 식생활교육을 담당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최근 들어 강좌 수강생 가운데 중년 남성의 비율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 기사에서는 최근 한 요리학원의 생활요리반 수강생 중 남성 비율이 60%에 이를 정도로 크게 늘었다고 전하고 있다. 대부분의 동기는 ‘혼밥’을 해야 할 때를 대비한 것이라지만, 부엌일을 비롯한 살림노동을 정해진 누군가의 몫으로만 여기지 않게 된 시대의 모습임은 틀림없다. 요리강좌는 신부수업의 경계를 벗어난 지 오래이고, 그 내용도 손님상 같은 거창한 상차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혼자 살거나 같이 살거나 끼니를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종종 맞닥뜨리게 되면서 나를 위한 건강하고 맛있고 간편한 요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한 망이나 한 묶음의 식재료를 감당하지 못해 썩혀 버리거나 상대적으로 비싼 값을 주고 소용량으로 구입하는 것은 1인분의 밥상을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급기야 ‘사먹는 게 더 저렴하다’는 말이 정설처럼 유포되지만, 실은 얼마간의 시간과 수고를 들이는 것으로, 혹은 적절한 살림감각을 익히는 것으로 그 비용을 대신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먹는 일은 곧 건강과도 직결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외식(매식)과 간편식으로만 채우기엔 우리에게 남은 끼니가 너무 많다.

엄마에게서 전수받던 생활의 지혜는 이제 온라인 공간에서 어렵지 않게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갖가지 레시피와 상황별 살림 팁들을 모아둔 앱을 참고하는 방법도 있다. ‘김장’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막막함과 달리 혼자 먹을 만큼의 김치를 담그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물론 여럿이 손을 모으고 각자 나눈다면 힘은 덜고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 여전히 내게는 가장 맛있는 엄마의 김치 맛, 장맛을 물려받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저마다의 살림을 살듯 저마다의 맛을 만들어가는 것도 그 나름 좋은 일이리라.

밥하기보다 더 지루하고 마찬가지로 끝없이 반복되는 여타의 가사일 역시, 감각을 익히고 요령을 체득하면서 시간과 강도를 줄여나가는 것 정도를 타협점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물론 이는 개인 몫의 노동 안에서 적당한 균형을 찾아가는 것과 함께 가야 하고, 그런 점에서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과로사회로 잘 알려진 우리나라는 하루 중 유상노동 시간이 348분으로 OECD 26개국 가운데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반면, 무상노동(가사, 장보기, 돌봄, 봉사활동 등)에 할애하는 시간은 136분으로 가장 적었다. 자연히 그 둘의 차이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높다.2)

 

만인의 살림꾼화

살림노동의 측면에서 1인의 삶은 달리 말하면 엄마와 아내가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결핍’은 비단 1인가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엄마에게도 은퇴 이후의 삶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우리 엄마 세대와 같은 ‘엄마’들이 줄어들고 있다. 또한 최근 출간된 책 제목이기도 한 ‘아내 가뭄’이라는 말처럼 아내가 있는 삶은 여성에게는 여전히 ‘매우’ 드물게 존재하며 남성에게도 점점 더 희소해지고 있다. 하지만 삶이 계속되는 한 매일의 생활이 쌓여가는 만큼 해야 할 살림은 그대로 존재하니, 출발은 당연하게도 모두가 자기 몫의 1인분을 책임지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무급 혹은 유급으로 살림노동을 수행하는 전문 살림꾼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살림을 꾸려갈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갖추는 것이 당연시되는 ‘만인의 살림꾼화’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요리교실을 찾지 않아도 밥 먹는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삶에서 중요하게 배워야 할 것들의 우선순위를 다시 살펴야 할 때다. 무엇보다 살림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조기교육의 부작용을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므로.

그렇게 살림노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찮은 노동이 아니라 ‘살리는 일’로 인식되는 것은 시장에서의 살림노동이 온전히 평가받는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가정 안에서도 밖에서도 살림노동에는 아직 더 많은 존중과 인정이 필요하다. ‘주부들의 살림’이 세계를 바꾼다는 말이 ‘모두의 살림’으로 대체되어 다시금 유효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어렵게 온 새 봄에 함께 만들어가고픈 세상의 모습이 매일의 살림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생각하며, 오늘도 1인분의 쌀을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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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7년 3월 기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1인가구는 35.1%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2) <Time use across the world> 참조. OECD 평균 무상노동시간은 208분, 유상노동시간은 268분. 각 국가별로 1999년~2014년 사이 각기 다른 연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어 단순 비교에는 어려움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