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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 칼럼
개발주의 욕망의 사회화를 넘어서

개발 주의는 이 시대의 종교다. 개발 주의에 기초한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진보와 보수 상관없이 개발 주의 욕망은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촛불 혁명을 통해 탄생한 현 정부와 여당은 사회 개혁에 대한 다양한 국민들의 열망을 오로지 일자리 창출이라는 매우 협소한 과제로 한정시켜 놓고 성과를 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자리 만들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 창출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정부는 일자리 창출보다 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예컨대 올해 여름 누구나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기후변화의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서 국가 산업 구조와 정치 시스템, 더 나아가 발전 패러다임을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어떤 비전을 제시할 것인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하고 철저히 이익 집단화 되어 버린 국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의 경향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소위 4차 산업혁명이라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고등교육의 목표와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등의 심각하고도 총체적인 난제들과 씨름해야 한다.

 

물론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현 정부는 중요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성과도 올렸다. 하지만 그 이외에 모든 것이 다 일자리, 즉, ‘기-승-전-일자리 창출’ 로 귀결되는 것은 문제다.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의 도식적인 예를 들어보자. 예컨대 정부가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미세 먼지 대책을 심각하게 고민할 것이고, 수도권의 개별 입지 사업장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현재의 ‘대기환경보전법’ 에 의해서 환경 기술인을 고용해야 하는 조건을 좀 더 강화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즉, ‘기업 활동 규제 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 에 의해 많은 예외 규정 등을 두어서 고용이 줄어들게 된 환경 기술인의 고용을 확대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업체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재정을 확충하여 일정 기간 임금을 지원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세 먼지를 저감하여 지속가능성을 높이면서 동시에 일자리를 늘리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도식적이고 단편적인 예지만, 지금처럼 일자리 창출 실적에만 매달리는 것은 온전한 정치라기 보다는 정치 공학에 가까운 것이라 우려스럽다.

 

과거 미국의 뉴딜 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전략을 통해 양극화된 불평등 구조를 해소하려는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과연 지금과 같은 지구적 경제 시스템에서 소득 주도 성장이 타당한 전략 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사회적 논의를 해봐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장하성 청와대 정책 실장이 반박한 것처럼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려면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조사와 이에 기초한 판단이 있어야 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논의를 위해 필요한 사실적 기초도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통계 청장 교체 과정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한국 노동 통계에서 고용, 가구 소득, 개인 소득을 보는 통계가 모두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업률은 경제 활동 조사로 추정하고, 가구 소득은 가계 동향 조사나 가계 금융 복지 조사로 추정하고 놀랍게도 개인 소득은 아무것도 조사된 것이 없다고 한다. 정부에서 개인 소득 불평등에 대한 원자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러면서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소득 불평등을 (전부는 아니지만) 완화하겠다는 주장을 어떻게 할 수 있나? 물론 언론들이 가짜 뉴스나 악의적인 왜곡 보도를 일삼는 것도 현실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현 정부 경제정책의 무능함을 강조하면서 정부의 정당성을 흔들고 있으며, 특정한 이익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기초적 사실 자료 부족과 더불어서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봐야 할 것은 언론이 왜 이런 식의 기사를 계속해서 올리고, 이것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하는 점이다. 대자본 언론이 자본의 이익을 반영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 박사 과정에 있던 매트 겐츠코프(Matt Gentzkow)와 제스 사피로(Jesse Shapiro)는 2000년대 초반에 인터넷에 디지털화되어 있는 언어 분석을 통해 언론이 왜 좌나 우로 편향되는가를 연구했다. 이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필라델피아나 디트로이트처럼 특정 지역이 전반적으로 진보적이면 그곳의 1등 신문은 진보적이다.

 

반대로 텍사스 애머릴로처럼 특정 지역이 보수적이면 그곳의 1등 신문은 보수적이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기업이나 부자들이 언론을 지배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강요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언론의 소유주들은 단순히 대중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서 부를 쌓으려는 목적이 더 크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이긴 하지만, 겐츠코프와 사피로는 미국의 신문들이 좌편향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사실 진보 편향의 신문은 신문 독자들의 요구에 맞춘 결과일 뿐이다. 신문 독자 층은 평균적으로 약간 좌편향이다. 즉, 신문이 약간 좌편향인 것은 그것이 독자들이 원하는 견해이기 때문인 것이다. 거대한 음모란 없고, 자본주의의 철칙만이 냉정하게 관철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재 우리의 미디어 환경에 적용해보자. 우선 우리는 신문 독자들이 미국처럼 좌편향일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공중파, 종편, 신문 등을 막론하고 그냥 언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왜 많은 언론들은 현재 정부의 경제적 무능을 지속적으로 비판할까? 그리고 그러한 비판이 먹혀 들어가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갈수록 낮아질까? 언론이 대중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언론을 이끈다. 좀 더 정확하게 대중들의 욕망이 언론을 이끈다. 따라서 언론은 대중들의 욕망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거울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전히 보수적이고, 개발 지향적인 대중들의 욕망은 가짜 뉴스나 찌라시, SNS 등을 통해 여과 없이 공론의 장에 드러나고 확대 재생산된다. 이를 감지한 것일까?

 

현 정부의 대응은 개발주의로의 회귀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매우 미온적인 태도, 에너지 전환보다 산업 발전에 더 치중하겠다고 선언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발언, 환경부차관의 이유가 모호한 경질 등이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최근 환경운동연합에서는 ‘환경부차관 경질이 개발 주의로 가는 신호탄인가’ 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기도 했다. 여당 대표로 이해찬 대표가 등장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참여 정부 시절 방사성폐기물처분장 공론화 문제로 한창 시민 사회와 정부가 논의를 이어갔고, 어느 정도 합리적인 합의에 이르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국회, 정부, 시민 사회 등이 참여해서 만들어 놓은 합의안은 이해찬 총리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하루아침에 뒤집어졌다.

 

중 · 저준위 폐기물 처분장은 공론화를 하지 않고, 고준위 폐기물 처분장만 공론화를 하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당시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실무자로 일했기 때문에 그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너무나도 황당하고 독선적인 결정이었다. 예전 총리나 현재 총리 개인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발 주의의 심성이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깊게 뿌리내리고 있어서 쉽게 변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으로 두 사람을 거론했을 뿐이다.

 

개발 주의 욕망의 사회화는 매우 오래 지속되고 있고, 우리 사회 깊숙이 스며들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그러하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개발 주의 욕망의 사회화 과정에서 벗어날 것인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할 수 없지만, 가능하다면 녹색당이나 녹색전환연구소에서 빅 데이터 분석을 통해 우리나라 국민들의 개발 주의 욕망이 어느 정도나 공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 자료를 만들어보는 것에서 출발하면 어떨까 싶다. 솔직한 욕망의 지도를 가지고 있어야 어느 곳이 약한 고리이고, 어느 지점을 어떻게 공략하면 생태주의적 전환이 가능 한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순수하고 열정적인 대안적 삶의 실험도 필요하지만, 지도가 있어야 실험도 방향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개발 주의 욕망의 사회화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냉정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