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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되는 똥 이야기

사무실 건물 앞에 커다란 분뇨수거차가 멈춰 섰다. 1년에 한 번 치르는 연례행사, 바로 그날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 앞에서 새삼스럽게, 혹은 당연하게 ‘똥’ 을 떠올렸다.

어린 아이들은 왜인지 똥이라는 한 글자에도 요란하게 깔깔대지만 나이가 들면서 누구도 똥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때 주위에는 ‘똥’ 을 주제로 진지하고 유쾌하게 이야기 나누던 청년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내가 싸는 똥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해, 똥을 대하는 태도와 똥의 쓰임에 대한 길고 짧은 대화가 수시로 이어졌다. 날마다 수세식 변기 속으로 대소변을 흘려보내는 문제를 두고 정말이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젊은이들은 보기 드문 존재들임에 틀림없었다.

 

질문은 답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 실천으로 이어졌다. 텃밭농사에 관심이 많았던 한 친구는 오줌을 모아 액비를 만들고 운반해 뿌리는 수고를 자처했다. 잘 발효된 오줌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주거 공간이 허락하던 시기에 단순한 생태뒷간을 만들어 그야말로 ‘똥무더기’를 쌓아두고 퇴비가 되길 느긋하게 기다리던 친구도 있었다. 돈과 뜻을 모아 해보고 싶은 각자의 사업 아이템을 얘기하는 자리에서도 똥과 오줌을 모으는 일은 집요하게 이야기되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어떤 책보다도 설득력 있게 다가와 나 역시 한때 화장실이 없던 시골 밭에 생태뒷간을 만들어볼까 나름의 설계도를 그려봤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별수 없이 다들 수세식 변기의 레버를 내리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적어도 일찍이 밥이 똥이고 똥이 밥이라는 데 눈떴던, 그걸 알아버린 이상 고민하고 실천해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생태 감수성 충만한 청년들이었다.

 

먹고 싸는 일의 순환을 생각한다

 

그동안 일과 활동의 공간에서 그런 청년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청년 대상 프로그램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만난 청년들에게서는 크든 작든 어떤 생태적 감수성이 장착돼 있었다. 생태주의는 정돈된 이론과 언어 이전에 이미 삶의 문제였다. 밥과 똥이라는 화두만큼이나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으려는 청년들이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중 한 부부는 환경단체와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하면서 앎(또는 말)과 삶이 불일치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경북 봉화로 귀농해 자신들만의 생태 귀농 분투기를 써내려 가고 있었다. 몇 년이 흐르고 최근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사이 자연양돈이라는 새로운 길에 발을 들였다고 했다. 처음 귀농을 결심했을 때의 생각은 두터운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어떤 점은 그리던 모습과 많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스스로 집을 지어올린 땅에 다시 온몸의 근력을 써가며 축사를 짓는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그들다웠다. 수차례 구제역과 조류독감 파동에도 달라지지 않는 축산 문제를 보며 한동안 채식을 하기도 했다는 부부는, 아이가 태어나고 다시 육식 생활을 하게 되면서 ‘고기를 먹는 문제’를 다시 맞닥뜨리고 늘 그랬듯 삶을 앎에 일치시키는 태도로 돌파해보기로 한 듯했다.

 

고기를 즐겨 먹지 않아서인지 나에게 자연양돈 이야기는 고기의 맛과 질, 돼지의 ‘복지’에 앞서 순환을 먼저 떠올리게 했다. 농사부산물을 발효시키고 풀을 베어 돼지를 먹이고 그 돼지의 배설물은 자연히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풍경, 똥이 다시 누군가의 ‘밥’이 되는 상상, 불필요하고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처리’해야 할 어떤 것도 남지 않는 상태를 생각하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만난 또 다른 청년 농민은 다양한 종류의 토종벼 농사를 지으며 마을에서 작은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정미소의 이름은 ‘맑똥작은정미소’인데, 짐작하듯 맑똥은 맑은 똥의 준말이다. 맑은 것을 먹고 맑은 똥을 싸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그는 맑은 얼굴로 이야기했다. 먹고 싸면서 생을 이어가는 순환을 생각한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해서 새롭게 들렸다. 여전히 ‘똥’의 문제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누군가의 존재가 반가웠던 것은 물론이다.

 

먹고 싸는 일에서 쓰고 버리는 일까지

 

먹고 싸는 것은 크게 보아 쓰고 버리는 일과도 같다. 지난해의 뉴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수도권의 폐비닐 대란은 그동안 눈앞에서 치우기만 하면 되었던 쓰레기들이 비로소 자기 존재를 과시한 사건이었다. 제주에서는 축산 분뇨를 그대로 방류하는 문제로 주민들 간 갈등이 계속되고, 적정 처리량을 넘어 정화되지 않은 하수가 그대로 바다에 방류되는 일이 수차례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종종 무능하고 무책임한 행정에 대한 규탄으로 이어지지만, 더 많은 비용을 치르고 시설을 증축하는 것 이상의 근본적인 대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안 보이는 곳으로 옮겨졌어야 할 쓰레기들이 그대로 쌓여 있을 때, 썩지 않고 부유하는 비닐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했을 때, 보이지 않는 관 속을 흘러야 할 오수가 뜻밖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혹은 어느 날 분뇨수거차가 불쑥 눈앞에 나타났을 때야말로 우리가 먹고 쓰고 배설하고 내다버린 것들과 그 방식에 대해 생각해볼 순간이다.

 

보이지 않아도 늘 보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역시나 지식보다는 예민한 감수성이 아닐까. 누구의 밥도 되지 못할 것들을 너무 많이 배설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맑은 밥과 똥의 순환을 이야기했던 그때 그 청년들의 질문으로부터 너무 멀어지지 않아야겠다고, 더불어 나뿐 아니라 모두가 그러하기를, 새해를 핑계로 다짐과 바람을 하나씩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