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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 칼럼
돌봄을 적립할 수 있다면

얼마 전 읽은 소설 속 한 장면. ‘육아 품앗이’라 할 만한 실험이 진행된다. 8명의 양육자가 3개월 된 아기를 하루 3시간씩 맡아 보살핀다는 설정이다. 언뜻 대가족, 공동체, 마을 같은 배경을 떠올릴 법하지만 부모 2명을 제외한 참가자들은 아이나 부모와 어떤 혈연관계도 아닌 생면부지 남인데다 심지어 자녀 양육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다. 실제 상황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은 훗날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의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부모는 언제든 CCTV로 촬영된 영상을 볼 수 있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두었다. 실험은 큰 사고나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고 참여한 이들의 반응이 대체로 긍정적이었던 반면 실험을 설계한 ‘연구진’ 내에서는 여러 질문과 회의적 반응이 제기되었다.

 

독자들 또한 쉽게 떠올릴 법한 우려 혹은 의구심은 우선 아이가 주 양육자(대부분 어머니)와의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해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공동 양육자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 협력에 참여하게끔 하는 동기가 충분한가 하는 질문도 예상 가능하다. 실험을 주도한 소설 속 인물이 좀 더 보완된 아이디어를 준비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대목에서 그 이야기는 멈추어 더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이후의 전개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졌다. 비현실적 요소들로 설계된 듯한 그 실험은 한편 누군가(들)의 절실함이 담긴 것처럼 느껴져서 조금은 응원하는 심정이 되었던 것 같다. 쓰이지 않은 그 뒷이야기가 더욱 궁금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사회적 돌봄이 안정적으로 작동된다면 달라질 수도 있을 선택들에 대해서.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실제 마을에 속해 있는 부모도 아이를 함께 길러줄 마을도 이제는 드물기에 특별한 사례로 소개된다. 그보다는 아이를 낳은 뒤 집안에 갇혀버린 엄마들을 더 많이 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아이 하나를 기르는 데 그렇게 절절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부모 세대의 말은 위로도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가족은 적어지고 ‘마을’은 기본 조건이 아닌 시대, 위 소설 속 실험은 친밀한 관계 내에서 조건 없이 이루어지던 돌봄을 사회 전체의 협동 시스템을 통해 작동케 하자는 하나의 제안으로 읽혔다. 사회의 돌봄 책임을 강화하는 동시에 가정 내에서도 특정인에게 집중적으로 지워졌던 돌봄의 역할과 책임을 분산함으로써 한 사람의 삶에서 다른 부분을 지나치게 포기하거나 희생하지 않고도 돌봄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섞인 아이디어다.

 

이는 한편으로 의무와 책임, 소유와 애착 관계로 단단하게 얽혀 있는 가족이라는 틀을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 경계의 이동과 재배치가 불가피할 것이다. 누군가의 가족이면서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정체성, 그 소속감과 책임의식이 조화롭게 형성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면 지나친 긍정일까.

 

 

돌봄을 적립하기, 돌보는 사람 되기

 

오래전 지역화폐를 준비하는 모임에 몇 차례 참여했을 때 비슷한 주제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아가면서, 가령 지금 마을의 어르신들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적립되어 훗날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내가 제공한 돌봄을 필요할 때 돌려받는다는 아이디어는 그렇듯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각자 가진 시간과 노동을 교환할 수 있는 지역화폐 성격의 타임뱅크는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사회복지협의회에서 운영하는 돌봄 은행이 있어서 돌봄 봉사활동을 통해 포인트를 쌓고 본인 또는 가족이 65세 이상이 되었을 때 이용하거나 기부할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돌봄의 주체가 되는 기회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 의미 있게 보였다.

 

소설 속 아이디어와 같은 돌봄의 순환 시스템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도 ‘돌보는 사람’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 참여자들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어떤 종류의 돌봄이든 마음이 중요하지만 마음만으로 충분하진 않다. 당연하게도 돌봄을 적립하려면 우선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절대적인 돌봄을 받으며 자라나지만 누구나 절로 잘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돌봄에도 얼마간의 경험과 역량이 필요하다면 그 기본은 당연하게도 공감과 의사소통 능력일 것이다. 가령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도 모든 필요한 것들을 주문하고 수령할 수 있는 ‘비대면 사회’에서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필요와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을 잃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더욱 필요해졌는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돌봄 로봇이 등장하고 실제 노인 돌봄 영역에 시범적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필요로 하는 돌봄이 로봇으로 온전히 대체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아직 조금 미뤄두어도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부양가족 없이 단지 스스로를 그럭저럭 감당해오고 있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돌봄의 필요도 돌보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도 좀처럼 가지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부모님과의 동행 길에 어느 순간 손을 끌어 앞장서 가게 되는 때가 오듯, 우리 모두는 돌봄의 대상에서 돌보는 사람으로, 다시 또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되어 생을 살아간다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마주한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성심껏 돌보는 무수한 반려인 들을 보며,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으로서 어쩌면 돌봄의 욕망 같은 것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닌지 짐작해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필요와 욕망이라는 보편적이고 특수한 조건들 속에서 가깝게는 주변의 관계에서부터, 보다 넓게는 불특정 사회 구성원들과 협력하며 돌봄 받고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런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이 ‘돌봄 위기’ 시대에 우리 각자와 사회에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