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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은 녹색]한국의 현주소 상(上) - 붕앙 이야기

*이 글은 2022.2.7 다른백년에 정기 연재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기대 바랍니다. http://thetomorrow.kr/archives/15276

 

0.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 무엇인지 그것을 바르게 정의합시다. 그러나 도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정명, 이름을 바르게 부릅시다. 그러나, 내가 부르는 이름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도와 명은 시간과 장소의 조건과 상황을 반영합니다.”1)

 

도덕경의 첫 머리에는 늘 변하는 도를 정의할 수 없음을 말하면서 도를 정명하고 있다. 한국철학을 정의하는 것도 이와 같은 작업이라 생각한다. 한국의 현주소를 짚는 작업 또한 물을 긷기 위해 우물을 파는 것처럼 한국철학의 도를 긷기 위해 전제와도 같은 작업이다. 그러나 이 또한 마찬가지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화무쌍한 주소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주소를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써내려가는 것이나, 한국 사회는 주소지가 자주 바뀐다. (실제로도 한국의 평균 이사 빈도는 높기가 허다하다.) 이사가 잦은 이 사회에서 이전의 주소지들은 경로를 나타낼 뿐 지금 당장에는 덧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 여기’에 함몰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우리가 ‘지금, 여기’를 사는 이상 이것을 말하지 않고서 다음의 것들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역사가의 어려움으로, 사실의 혼잡과 사실의 부유란 어둠 속에서 물을 긷는 것이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한국철학의 역사관 혹은 서술의 방법은 어떠해야 할까. 방법은 다양하다. 현인의 말들을 빌려와 명석한 분석을 진척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어떤 시대의 ‘말씀’이 있다고 여기지만, 가만히 앉아 지혜로운 말씀이 주어지기를 기다리기에 세상은 너무 소란스럽다. 더하여 현재의 한국사회가 중독된 근대 문명과 그 구조로서의 여러 기제들을 해부하고 해석하는 일은 분명 중요하지만, 이 사회과학적인 접근법은 못내 피곤할 뿐더러 그 틀 자체의 자명함만큼이나 분명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떠오르는 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종(種)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진화했다”는 소설가 켄 리우의 문장과 이를 빌려 “기후위기 시대의 이야기 짓기”가 필요하다는 도반의 말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내가 겪고 듣고 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도겠다.2)  우리가 사고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내가 택한 방법론은 이야기 짓기다.

 

 

붕앙 이야기

 

1) 붕앙, 마지막 석탄발전소 이야기

 

이것은 곧 베트남 하띤성에서 완공되어 탄소중립이어야 할 2050년이 지나도록 굴뚝에서 연기를 뿜을 한 석탄발전소 ‘붕앙-2’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 붕앙과 둘러싼 사건들이 한국의 현주소를 단연코 보여주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여타의 지표들로는 말할 수 없는 한국의 주소를 붕앙은 말해준다.

 

2020년은 한국의 기후일정에서 다사다난한 해였다. 기후위기의 위협과 진실 앞에 각종 녹색 비전을 담은 말들이 날아다녔다. 2020년 7월 14일 한국판 그린뉴딜이 발표됐고, 2020년 10월 28일 문재인 대통령이 2050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2020년 10월 5일 한국전력 이사회에서 베트남 붕앙-2 석탄발전 ‘수출’이 최종 결정됐다. 이것이 한 나라 정부에서 한 시에 빚어진 일이다. 안으로는 그린뉴딜을(녹색전환의 비전을 걸고 녹색성장을 꿈꾸며) 내걸고 탈석탄 정책을 펴지만, 밖으로는 해외석탄투자를 일삼는다. 마지막 석탄발전소는 붕앙은 2050년, 가까스로 탄소중립이어야 할 시기에도 지어져 돌아갈 것을 예정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짓는 자와 9,10 호기, 베트남에 짓는 붕앙-2호기에 들어가는 한국전력, 한국수출입은행, 한국무역보험공사, 하나은행, 삼성물산, 두산중공업 등지는 기후악당의 중심을 구성하고 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기업을 살리며 추진된 이 석탄발전소는, 입으로 위기를 말하며 학살을 이어간 이들의 모순성을 드러낸다.

 

붕앙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붕앙은 “인도네시아에서 지어지는 자와 9, 10호기이자 국내의 신서천화력, 고성화이화력 1, 2호기, 강릉안인화력 1, 2호기, 삼척화력 1, 2호기이다. 나아가 가덕도와 제주의 신공항이자 호주의 석탄 광산이자 미얀마의 가스전이다.” 한국의 경제 특성은 석탄발전소와 공항을 보면 자세하게 흐름이 잡히는데 안으로도 밖으로도 모순적이다. 안으로 한국은 국내에만 6개의 석탄발전소, 6개의 신공항을 짓고 계획하고 있다. 몇 기의 석탄발전소는 이미 가동을 시작했고, 한 달여 전 나온 6차공항개발계획을 보면 지역을 살리겠다는 묘책으로 신공항이 등장한다. 머지않아 좌초자산이 될 인프라이자, 국가의 비전과 대치되는 사업들이지만 그리 어색하지 않게 존재한다. 오랫동안 성장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추출적 경제(extractive economy)체제의 관성에 갇힌 까닭이다. 밖으로는 더하다. 한국 기업들은 해외로 나가 팜 플랜테이션, 석탄, 가스전 개발 등 내가 생태학살(Ecocide)라고 부르는 짓을 벌이고 다닌다. 포스코의 미얀마 쉐 가스전 사태나 삼성의 호주 바이롱 광산, 아다니 사업 등이 지난 십수년 간 동안 있어왔다. 이 모순들이 자연스럽게 스며있다는 면에 주목해야 한다.

 

‘국익∙개발∙성장주의’로 요약되는 한국의 역사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50년 한국은 6.25전쟁 후 잿더미 앞에서 한국은 국가적 사명을 걸고 경제성장을 추동했다. 여기에는 식민지배와 전쟁의 한 맺힘과 북한 앞에서의 이념대립이 원동력이 되었다. 1970년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진행된 ‘잘 살아보자'는 슬로건의 새마을운동은 국익∙개발∙성장주의가 깊게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된다. 이는 ‘한강의 기적’으로 민족적 자부심이기도 해, 민주화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은 ‘잘 살지 못하면 죽는다’는 국민적 트라우마로 남아 개발성장주의를 더 단단하게 했다. 이 ‘추격국가’의 열등감과 ‘한강의 기적’을 일군 ‘성장신화’는 2008년의 녹색성장과 2020년의 한국판 그린뉴딜까지 그 흔적이 짙게 묻어들어가 있다. 이 역사 속에서 ‘국익’을 위한 사람(과 환경)의 희생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주는 국가로’ 라는 코이카의 슬로건은 이 왜곡된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아직도 많은 진보운동들은 한국의 이 급속한 경제성장/압축적 근대화가 낳은 부작용에 시름하고 있다) 결국 국익∙개발∙성장에 대한 일념이 너무 강하게 자리잡아, 녹색을 말하더라도 국익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녹색, 성장을 위한 녹색, 개발을 통한 녹색이 되고 마는 것이 한국의 실정이자 현주소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녹색이긴 한가. 기후위기를 막고,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며, 생태적 안녕을 추구할 수 있는가.

 

 

2) 생태학살 이야기

 

붕앙은 기후위기 시대에서 석탄발전소를 짓는다는 일이 가지는 터무늬 없음을 고발하지만, 실은 이 문제는 보기보다 복잡하다. 근본적으로 붕앙 사건은 생태학살이라는 환경범죄로 다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가범죄와, 평화에 반하는 오랜 역사적 가해와 피해의 성장·개발주의로 말해져야 하고 강조되어야 한다.

 

나는 몇 년째 생태학살(Ecocide)를 연구하고 있다. 기후위기와 생물다양성 파괴, 유독화학물질, 대기∙해양 오염 등 각종 행성 한계(Plentary Boundary)에 반하는 각종 사태를 ‘환경 오염(환경 관리 실패로서의)’을 넘어서 ‘생태학살’로 명명화 하는 것이다. 생태학살은 무척 직관적인 말이다. 개념을 먼저 알고 쓴다기보다, 처참하게 망가진 이 지구의 한 장면에 감탄사처럼 흘러나오고 만 말에 가까운 듯하다. 내가 처음 이 석탄발전소의 까만 굴뚝과 석탄채굴지의 구덩이와 죽은 산호초 군락을 둘러싼 장면을 봤을 때 남았던 하나의 질문처럼. “이 붕앙-2는 생태학살이지 않은가.”

 

베트남 중부 하띤 성 붕앙-2가 지어질 대지는 갖은 환경재난으로 ‘죽음의 땅’이 된지 오래다. 그곳의 사람들은 석탄발전소 옆의 삶은 지옥이라고 말한다. 붕앙-1 석탄발전소의 온배수로 인해 산호초 군락이 절멸했고 인근 해양 생태계는 심하게 망가졌다. 더해서 해당지역은 2016년 포르모사Formosa 제철소 유독물질 해양 유출 사건으로 베트남 역사상 최악의 환경피해를 입었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인근 지역의 주민들은 생계수단을 모두 잃었는데, 그 마당에, 석탄재(coal ash) 보관 누수와 기타 문제로 인한 수권 파괴, 우물은 색이 변하고 빗물은 받아 쓸 수 없어서 없는 돈을 물을 사는 데 써야 한다고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석탄발전소의 굴뚝에서는 검은 잿가루가 나와 바람따라 흩날리고 바다따라 퍼지고, (한국보다 낮은) 배출 기준 탓에 대기오염은 심각하기 그지없다. 지역 주민의 재정착 관련 강제이주 문제도 있다. 기침은 기본으로 달고 살고, 심장병, 뇌졸중, 폐 질환, 피부 질환 등 온갖 병을 앓으며, 암에 걸린 이들이 그렇게 많다고 한다. 붕앙-1이 가동된 이후 2017~2018년 지역 보건소의 심혈관 및 뇌졸중 환자가 105명 발생했고 14명이 사망했다. 붕앙-2가 가동되면 더 많은 조기사망자가 생길 것이다. 이런 곳에 석탄발전소를 짓는 것이 학살에 준하는 사안인 까닭이다.

 

생태학살이라는 단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70년인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에 의해 뿌려진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고엽제를 뿌린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전쟁의 한복판, 미군은 제초전의 일환으로 유독성 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를 비행기로 광범위하게 살포했다. 역설적이게도 고엽제를 발명한 식물생리학자 아더 갈스톤Arthur Galston은 그 위험성을 알고 있었고, 그는 워싱턴 연설에서 이 범죄를 ‘황폐화 그리고 파괴’의 생태학살Ecocide라 처음 불렀다. 베트남 정부에 따르면 480만 명의 베트남 국민들이 노출되었고, 그 중 40만 명이 죽거나 장애인이 되었으며, 50만 명의 신생아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환겨범죄가 단순히 환경에 해당하지 않는 까닭이다.

 

아직도 이 반 세기 전의 전쟁의 역사와 기억과 피해는 지금도 각종 상흔을 남기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전쟁은 두 나라에 있어서 슬픈 이정표가 된 듯하다. 붕앙-2를 들여다보며 언제부터 한국이 가해의 나라가 되었을까 묻게 되었다. 한국이 분명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말 못 할 피해로 얼룩졌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한국의 베트남전쟁 파병은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역사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때 한국은 처음으로 가해국이 된다.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늘 짓밟혀온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미국과 함께 파병되어 학살의 참극에 일조한 역사를 지니게 된다. 베트남에는 퐁니-퐁넛 마을로 대표되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현장들이 있다.

 

베트남 전쟁의 문제와 석탄발전의 문제는 얽혀/연결되어 있다. 베트남 정부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다. 삼성 반도체 공장의 노동착취, 성문제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베트남 수출 GDP의 1/3 가까이를 삼성이 차지한다는 사실(올해 베트남 총리는 삼성의 이재용을 네 번 만나 공장 유치를 부탁했다)과 한국 정부가 3P를 내건 신남방정책의 주요한 파트너 국가로 베트남을 꼽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붕앙-2는 이 맥락과 무관하다 할 수 있는가?

 

지금의 붕앙-2는 한국이 '한강(경제성장)의 기적을 팔아' 아시아 국가들에서 녹색 착취를 일삼는 하나의 사례다. 이를 변주된 ‘생태학살’이라 부를 수 있을까. 역사를 거쳐 새로운 생태학살이 다른 방식과 양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붕앙-2는 무척 상징적이다. 주체가 군대에서 기업이 되고, 명분이 승리에서 경제성장 혹은 발전(Development)로 바뀌었으며, 피해의 범위가 기후위기를 타고 확장된 것뿐 구도는 같지 않나. 그보다 평화를 앗아간 말 못할 잔혹한 짓들을 전쟁의 승리니 ‘녹색성장’이니 분칠된 선의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는 슬프게도 닮았다.

 

나에게 있어 붕앙은 실은 한국철학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나라(혹은 공간)에서 있었던 수난의 역사와 그 가운데에서 피어난 뜻을 정리하여 철학으로 피워보고자 하는 바람을 품어오던 가운데, 한국이 기후악당이라는 오명과 마지막 석탄발전소를 베트남에 짓겠다는 비열한 행각은 용납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작게는 현행 정부의 모순이자 그린워싱이지만, 크게는 국가범죄에 준하는 수준의 녹색범죄이며, 더 크게는 한국의 철학이 지닌 가능성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정신적 자살행위에 그친다. 한국이 마지막 석탄발전소를 나서서 짓는 한, 표면적으로는 기후위기가 막중하고 대응해야한다는 말이 무색해지고 말고, 깊게는 한국철학의 체계가 빛을 잃는다. 단순히 석탄발전소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새 가해국이 되어버린 한국의 현주소를 이르는 것이다. 한국이 가해국의 반열에 오늘 것의 증좌는 차고 넘친다. 미얀마의 쿠데타, 홍콩의 시위에서 사용되는 탄압 무기 – 살수차 등 – 도 한국의 것이며, 한화 등에서의 무기수출을 일삼는 것도 한국이다. 명확하게 짚자면 1인당 세계 3~4위의 온실가스배출량과, 드높은의 생태발자국을 열거할 수 있겠다. 그러니 UN에서 역사 최초로 선진국으로 지위가 조정된 사실 따위 기뻐할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 돌아봐야 할 여지의 것이다. 녹색이 평화의 색인 한에서, 한국철학이 바로 서고 올바로 말해질 수 있으려면, 현재의 평화에 반하는 이상의 행각이 모두 사라져야 한다.

 

 

3) 재판 이야기

 

죄에는 책임이 따른다. 역설적으로 베트남 전쟁의 책임을 묻는 작업은 러셀-사르트르 평화법정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기초가 되었다. 이곳에서 전쟁범죄를 규정하고, 한국이 가해국으로 지정되며, 생태학살을 포함한 여타의 행각들을 죄로 규정하는 평화법정의 시작이 열렸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나,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만들어져 생태학살을 다섯 번째 국제 범죄의 반열에 올리는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2016년 10월에는 몬산토 국제법정(Tim, Tribunal international Monsanto) 열려 생태학살의 문제를 다루었다.)위기의 경고나 짓지 말라는 윤리적인 요청에서 이 사안의 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것으로 논의의 정도가 반인도적 범죄의 처벌로 달라지는 것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한편으로, 툰베리를 비롯해 세계 각자의 급진적 기후활동가들이 이제는 기후변화(Climate Change)를 기후위기(Climate Crisis)로 부르는 것을 넘어 생태학살(Ecocide)로 부르고 있다. 이제는 위기선포를 넘어 위기를 만드는 집단과 구조에 죄를 묻고,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멸종반란과 같은 단체도 생태학살을 범죄로 다룰 것을 요구하고 있고,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이 법의 제정에 대해 인정했으며, 관련 생태법학자들은 이제 국제 생태학살 범죄에 대한 법적 정의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미 많은 기후소송이 네덜란드 국가소송과 영국 히드로 공항의 판례와 같이 이례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는 맥락도 있다. 생태학살 법의 제정에 대한 작업이 탄력을 받는다면 근 시일 내에 기후위기 대응에 대한 판도도 많은 부분 바뀌리라 전망된다.

 

당장의 한국에서 나는 석탄발전소를 생태학살에 준하는 형사법적 죄로 처벌하라는 말들을 꺼내고 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여 그 과정에서 있었던 두산중공업 직접행동의 집회시위법 위반과 재물손괴죄 명목으로 재판을 해왔다. 얼마 전 나는 형사재판의 마지막 공판을 치뤘다. 판사가 선고문을 읽었다.

 

“피고인들 주장 받아들이지 않고 공소사실 전부 유죄로 인정합니다. 형을 정함에 있어 피고인들 공익에 헌신한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활동은 법질서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피고인들의 사전 계획 하에 실행한 미신고 옥외집회 주최나 타인의 재물 손괴 등 범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피고인들 목적의 정당성만 부르짖으며 이를 실현하고자 선택한 범죄에 대해서는 반성하거나 죄책감 느낀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아린 것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귀한 언어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벼운’것으로 취급되어 한 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대하게 적혀야 하는 국가의 책임과 방조 등 무겁게 기록되어야 할 것은 부재했고, 가벼운 것은 그 나름대로 사라졌다.

 

그런 꿈을 꾼다. 국가와 두산중공업을 위시한 기업들을 피고인석에 앉혀놓고 그들의 행각이 기후위기 시대의 중차대한 생태학살 범죄라는 것을 주장하는 장면을 꿈꾼다. 혹은, 현행 법 제도 내에서 이 취지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으니, 시민들이 모여, 각각의 변호사, 판사, 활동가, 연구자, 예술인, 등이 모여서 기후법정을 개회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의 직접행동에 대한 죄목을 무죄로 선언한 후, 누가 죄인(법인격)이고 무엇에 죄가 있는지를 선언하는 그림을 그려본다.

 

현재는 세계적으로 변화가 역동하는 추세라 석탄발전소가 녹색 범죄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남지는 않아 보인다. 그만큼 더 중요한 것은 아래로부터의 요구이다. 내가 그를 꽃이라 부를 때, 그가 나에게 와 꽃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석탄발전소를 기업과 지역경제를 살리고 국부를 창출하는 사업이라 부른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고, 막중한 지구적·기후위기 앞에서 자연을 착취하여 소수의 기업 법인격의 자본을 축적하고 지역의 경제와 사회 모두를 죽인 후 그 빛을 모두 미래의 생명에게 전가하는 국가기업 범죄라 부른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언어가 사람들의 부름과 쓰임에 의해 태동하고 변화하듯이, 법의 언어 구조 또한 커먼즈라 일련의 사건과 상황에 지극히 영향을 받고 그것을 넘어 변화하고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지금 여기’ ‘현행’법의 몰지각함과 시대착오적인 면이 마치 한국 기업의 경제적 몰지각함이나 그 극단의 비윤리성만큼 과하다. 이게 현주소다.

 

한국의 현주소에는 늘 착잡한 마음이다. 밖으로는 붕앙으로 상징되는 기후가해를 일삼고, 안으로는 반목하여 사회의 해체를 목도에 둔 지금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 마지막 석탄발전소가 지어지는 과정에서 정부와 기업의 장면들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나와 나의 팀처럼 붕앙을 막음으로써 기후위기를 막고 녹색평화를 실현해보자는 시도가 우후죽순 이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한국의 이야기이다. 앞으로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우리’로써 다른 이야기를 짓고 다르게 정의하며 나아간다면, 내일의 주소와 모레의 주소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선고 이후에 나는 이렇게 썼다.

 

“그렇기에 오늘을 뒤엎고 내일로 가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 그 자체이겠다. 오늘은 울 것이다. 마치 붕앙이 지어지던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애도밖에 없었듯이. 재판부의 수준과 인식 정도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애도와 유감 뿐이다. 분노와 투쟁과 형성은 그 다음. 고작 1심이고 아직 민사재판도 남았다. 우리는 젊고 석탄발전소는 2050년까지 계속되기에 시간은 한참 남았다. 다만, 섣불리 마침표를 바랬던 여린 마음이 내 스스로 조금 안타까울 뿐,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들은 늘 어느 과정 속에 있기 마련일텐데. 생으로써의 활동과 생존으로써의 투쟁 과정에 있는 모두에게 불완전하나마 평화가 깃들기를.”

 

하(下)

 

<참고>

1) 김재형·고석수·천바이비(2021), 『아름다운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 모시는 사람들

2) 윤민지(2021.6.10.), [에정칼럼] 기후침묵 속에서 무지개 전환을 - 기후위기 시대의 이야기 짓기, 레디앙 http://www.redian.org/archive/153200

3) 장윤석(2021), 「그들의 마지막 석탄발전소」, 바람과 물 http://www.wnwmagazine.kr/news/articleView.html?idxno=66

4) 장윤석(2021), 「다른 경제 없이 전환이 될리가 - 경제성장의 기각과 대안 경제의 모색 연습」, 녹색연합 토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