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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과 녹색]한국의 현주소 하(下) - 생태학살과 녹색전환 그 어딘가

©사포

 

0. 들어가며

 

전쟁이 나고 대선이 끝나고 한 달이 넘게 흘렀다. 나도 왜인지 모르게 잡고 있던 것들을 많이 놓아버리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미래가 암담했다. 21세기에 전면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생태학살(Ecoicde)을 다섯 번째 반인도적 범죄로 지정하자는 흐름은 일단 끊겼다. 제노사이드(Genocide)가 빚어질 수 있는 세계에서 생태학살을 논의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기후위기 대응은 필연적으로 평화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사회에 그 역량이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기후선거는 고사하고, 한시가 급한 이때 한국 사회가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지의 논의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앞으로의 시대에 우리는 맨몸으로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잔인한 시기로 기록될 이때를 나중의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돌아보기는 참 좋은 때다. 생각하니 기후라는 단어를 앞에 붙이고 비상하고도 어색한 표정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삼 년째다. 삼년상 치르듯이 기후를 잡고 왔다. 삼 년이라는 시간은 거취를 결정하는 시간이라던데,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싶다.1) 그간의 질문은 그나마 명확했다. 세계와 한국 사회가 기후위기를 마주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생태학살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지, 어떤 녹색전환의 뜻과 정책이 우리를 ‘구할 수’ 있을지 쓰려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갈팡질팡한다. 왜 세계와 한국 사회가 기후위기를 막을 수 없는지, 생태학살이 어떤 양상으로 자행되는지, 녹색전환 뜻과 정책이 자리 잡기에는 얼마나 이 토대가 허약한지를 써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실패를 증명한 이후에 무엇이 남을까. 그것이 알기 어려워 말을 보태지 않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써온 것들이 의미를 잃어버려 끄적인 여러 장을 버렸다. 암중모색이라는 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1. 생태학살  2)과 녹색전환

 

얼마 전 다녀온 첫 비질 이야기로 글문을 열어본다. 비질은 비인간 동물이 겪고 있는 폭력의 순환고리3)를 직시하는 활동으로 재연결을 주요한 기치로 한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장면은 우리 사회가 지닌 반-생명의 일면을 보여준다. 지민이 말하듯이

 

“노량진 수산시장 건물은 이 사회의 모습 혹은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6층은 법인 사무실, 5층은 고급 회 식당과 대회의실, 4층과 3층 승용주차장, 2층 일반 회 식당과 판매장과 금융시설과 홍보관 그리고 소형화물 주차장, 1층은 판매 자리와 경매장, 지하 1층은 활어보관장, 지하 2층은 폐수처리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 있는 상인의 처우개선이 이루어져야 지하에 있는 비인간 동물의 삶을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인간과 인간 외 모든 생물을 자본주의라는 고유의 방식으로 착취하고 부를 축적해야만 살아남는 구조가 만들어낸 문제이다.”4)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어떤 끊어짐을 보았다. 혹은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마도 그 공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있었는데, 모두 다 죽을 것들이었다.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살리고 싶었지만 단 한 생명도 살릴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되지 싶었다. 내 목숨줄 하나만 무사히 나오면서 기후위기도 마찬가지겠거니 싶었다. 오는 것을 알고 있고, 아마 지구의 모든 생명이 그 당사자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관찰에 그치고 말 것이다. 절로 생태학살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단어는 절망의 감정이 가득 찰 때 떠오른다. 정직한 절망의 감정들과 함께 떠오른다. 붕앙 석탄발전소가 지어진 곳 인근의 해양 생태계가 절멸했다고 들었다. 이를 기록한 베트남 감독 Nguyen Thu Dung의 다큐멘터리 제목이 『Fish Out Water』5)이니, 더 할 말은 없겠다.

 

비인간 동물에게 인간 동물이 느끼는 감정은 현존한다. 나의 서사에서 이것은 물살이들을 오랫동안 키워오면서 느낀 감정들로 이어진다. 어항에 이들을 키우던 때 나는 물살이를 먹을 수 없었다. 다른 동물들을 입에 넣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거리낌이 없었지만, 그 어릴 때에 내가 기르고 있는 이들을 식탁에서는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부조리하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친구들의 등쌀에 못 이겨, 혹은 음식을 남기면 안 되어 입에 넣었을 때 마음에 무언가 남았던 것이 어슴푸레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감각이 퇴화했는지, 이번에 노량진 수산시장에 비질을 오기까지 나는 입에 물살이를 넣는 것에 있어 별다른 마음을 느끼지 못했다. 일어나는 질문은 이렇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감각을 왜 잃어버렸는가. 한국 한 해 온실가스배출량 7억 톤, 석탄발전소 1200MW 기준 한 해 배출량 600만 톤 이렇게 수에 대한 감각이 점점 발달하는 반면, 생명에 대한 감각은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수의 감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생명의 감각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에 대한 언급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생태학살이라는 말과 연루된 어떤 자기의식 혹은 타자의식이다. 어떤 이가 들려준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해남에서 태어난 그가 생태학을 공부한 까닭은 사람들이 망가진 바다를 입에 올리지 않아서라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가 잃었던 언어를 찾기 위해서라고 말해주었다. 공장이 지어지고 푸르던 바다가 매캐한 색으로 변해가는데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보이지 않는 양 이미 변하여진 다른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는 그 공간의 사람들이 실어증에 걸린 것마냥 살아가게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그것을 헤어 나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생태학살이라는 말이 주는 해방감에 대해서 생각한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감각하기에는 너무나 멀고 복잡한 사태이자 전망이다. 특히 기후변화 혹은 지구온난화라고 쓸 때 우리는 이 말들이 ‘날씨 흐림’과 무엇이 다른지 쉽사리 알기 어렵다. 생태학살은 거대한 부조리가 우리의 인식체계 혹은 레이더에서 벗어나 있는 지금, 이것을 정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제노사이드가 전쟁의 비극과 그 한없이 무거운 책임에 대해 환기시켰듯이.

 

말들의 역사를 보면 현주소가 보인다. 우리가 생태, 생명, 녹색이 말들을 일상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라는 말을 들었다. 환경이 굳이 ‘보호’하고 ‘지켜져야’할 필요가 없을 때에는 환경운동이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기후·환경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지금은 무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단단히 크게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생태학살이라는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온 까닭을 찾아가다 보면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가 어떤가를 숙고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 삶을 생각하게 되는 역설이 생태학살의 서사 곁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멘탈리티 혹은 마음틀에 대한 이야기다.6) 집과 땅이 사는 ‘곳’에서 사는 ‘것’으로 바뀌어온 지난 ‘지오멘탈리티’의 역사가 비슷하다. 땅을 보는 마음틀을 지오멘탈리티라고 부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선거 의제에서 기후는 1%, 부동산이 70%가 나왔다고 들었다. 집이 투기의 도마 위에 오르다 못해, 나라 제일 선거의 중축을 차지하는 것이다. 땅을 보는 관점이 변해온 역사는 토지가 초래한 불평등의 역사와 합이 맞는다. ‘기후가 부동산에 잡아먹히는’ 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어떤 감각뿐 아니라 미래일 수 있다.

 

2. 그 어딘가

 

생태학살과 녹색전환은 우리 시대의 그림자와 빛을 상징한다. 암중모색의 어둠과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작은 빛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둠과 빛 사이를 방황하고 이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현주소를 찾아다니며, 진리는 늘 어느 사이에 있다는 말을 기억한다. 우리가 지금 확신하고 있는 많은 것들은 실은 이 시공간에서만 일시적으로 유효하기 때문이고, 참으로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늘 어떤 유연함을 갖추어야 한다. 노르웨이의 생태 작가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이 쓴『시간과 물에 대하여』7)를 읽다가 노자의 도덕경 한 구절을 인용하는 면이 와 닿았다. 수레바퀴 사이가 비어있음을 말하면서 있음의 유익함이 없음의 작용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수레바퀴가 굴러갈 수 있는 까닭은 비어있기에 그런 것이다. 마음이 절망으로 가득차면 비어야 굴러간다. 굴러오던 복도 달아난다. 우리는 비우는 것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희망은 발굴의 영역이다. 물론 힘들다.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감각, 감수성만큼이나 희망을 찾아내는, 길을 찾아내는 길잡이의 감각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마치 실크로드를 별자리 하나만 살피며 찾아갔던 옛 사람들의 감각 말이다. 희망과 평화를 상상하는 감각은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낯설 것이다. 어쩌면 이 한국철학과 녹색 작업을 포함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폭력의 순환고리를 끊어낼 어떤 복원인지도 모르겠다.

 

10년이고 100년이고 곁과 함께 준비해 나갈 때다. 뜻으로는 생명사상이 한국철학계를 평정하고, 활로는 한살림이 이마트를 이기고, 정치에서는 녹색당이 거대양당을 무찌르고 뜰 때가 있을 것이다. 장자는 어려운 시기에 잘 변방으로 가 준비를 하라 했으니, 그저 받아들일 일만 남았다. 평화세우기(Peace Building)은 이럴 때 하는 것이지 않을까. 아룬다티 로이의 말들을 건넨다.

 

“단 내가 특별한 존재나 리더인 양 나를 서사의 중심에 놓으려는 욕망을 경계한다. 세상엔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려 한다. 그래야 충분히 쉴 수 있고, 우정과 사랑, 연대, 농담과 웃음을 사랑하며 살 수 있다.”8)

 

로이가 태어난 곳은 인도의 실롱이란 곳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열 살 적에 살았던 곳이다. 북인도의 감각을 익힌 곳이다. 조금 내려가면 있는 고라마다 섬은 바다에 잠겨 기후위기가 말하는 바를 체감하게 된 공간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연결되어 있다. 자주 끊어져서 계속 매만져주어야 하더라도, 잊어버리지 않게 얼굴도 보고 같이 해보고 싶은 것도 나누고 하면 좋겠다. 그 어딘가에서 조만간 보았으면. 힘내자.

 


* 여러 차례 연재에 늦음에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글은 3월 25일 춘천에서 있었던 생명문명 포럼 1부 ‘새로운 생각, k-생명사상을 연다’의 자리에서 말한 말들과 이에 받은 환대와 감사를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참고>

1) 정혜선(2021),『나의 덴마크 선생님 – 불안과 우울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는 법 배우기, 민음사』

2) 다음의 책 참조. 조효제(2022),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창비

3) 존 폴 레더락(2016), 김가연 역, 『도덕적 상상력』, 글항아리

4) 지민(2022), 「올라와서야 보이는 것들」, 바람과 물 3호

5) Nguyen Thu Dung(2020), FISH OUT OF WATER 빼앗긴 바다, 그리고 삶 https://www.youtube.com/watch?v=ecWAWvyk7WQ

6) 윤홍기(2011), 『땅과 마음』, 사이언스 북스

7)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2020), 노승영 역, 『시간과 물에 대하여』, 북하우스

8) 아룬다티 로이(2020.11.11), “나는 싸우는 작가… 함께 세계의 무게중심 바꾸자”, 여성신문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