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애초에 독일에 갈 생각은 없었다. 누구나 겪는다는 회사생활 3년의 이직을 차라리 유학으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떠올렸던 나라는 프랑스였지 독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정치학, 그것도 정당정치를 공부하러 가겠다는 사람이 독일에 가야하지 않겠냐는 주변인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나는 독일에 왔다. 그러나 내가 독일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길게 잡아야 반년이나 되었을까? 나는 독일 정치에 대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어쩌면 ‘아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독일어라곤 몇 개월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내가 독일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 글은 ‘타지인의 시선으로’ 라는 전제 하에 출발한다.
# 정치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내가 독일에 도착한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 독일총선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사는 만하임이라는 도시는 선거운동이라는 것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도시가 크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길거리 가로수마다 정당홍보물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너무 조용했다. 한국이었다면 선거차량에 탄 선거운동원이 마이크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선거운동을 했을텐데 말이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광장 혹은 쇼핑몰에 가야 작은 책상을 두고 선거운동원들이 정당홍보를 하는 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다. 혹시 여기도 한국처럼 공직선거법이 지나치게 까다로워서일까? 어떤 정당들이 어떻게 홍보를 하는지 궁금해서 일부러 광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던 적도 있었다.
사진 : CDU 선거홍보관, 독일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인포그래픽으로 화면에 화려하게 보여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사람의 시선을 압도하는 그래픽이 인상적이었다. @신나희
나는 좀 더 큰 도시로 나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독일 총선을 보기 위해 일부러 베를린으로 오는 정치발전소 탐방팀의 도움을 받아서 대학교 및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연구자와 선거 관계자들을 만나고 각종 정당연설회를 직접 지켜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선거운동 전략과 관련해서 인상깊었던 것 중 하나는 베를린 노른자 땅에 마련된 기독민주당(CDU) 선거홍보관이었다. 일반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홍보관은 장난감 박물관 마냥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쓸데없이 과하지만 신기한 최첨단 설비와 시선을 압도하는 예술 작품들로 가득해서 기독민주당의 지지자가 아니어도 한 번은 와볼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는 짧게 홍보관을 둘러본 뒤 기독민주당 청년 홍보담당자와 두 나라의 선거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가장 효과적인 선거운동 방법은 선거당일 기준으로 7-8개월 전부터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가가호호 방문하며 정당홍보를 하는 것이었다. 잠깐,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선거운동을 한다면 분명 불법인데? 게다가 나는 분명히 베를린 곳곳에서 정당의 홍보문구가 새겨진 병따개, 콘돔 (콘돔이 선거홍보물이라니!), 모자, 풍선 등 각종 생활용품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보았다. 이건 정말 명백한 공직선거법 위반 사유가 아닌가!?
사진 : CDU 선거홍보 담당자와의 간담회 (뜨거운 질문열기!!) @신나희
사실 나는 고등학교 반장선거 이후로 선거운동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아는 바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선거운동이 공직선거법에 의해 촘촘하게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내용이 지나치게 꼼꼼하게 제한적이기 때문에 누구든 의도치 않게 선거법 위반혐의로 기소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합법적’ 선거운동이라는 것은 후보자와 그 가족을 포함하는 극히 일부의 사람만 정해진 기간 내에 정해진 방법에 의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2012년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예외적으로 온라인 선거운동이 허용되었지만 오프라인에서 사실상 유권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다, 한국사회에서 함부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아마 ‘선거’와 관련된 일이라면 일단 무의식적으로 움츠려 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독일은 연방선거의 행정적인 절차를 규정하는 연방선거법을 제외하면 한국의 공직선거법과 같은 선거법이 없다. 선거운동이라는 개념도 딱히 규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본 독일의 선거운동이라는 것은 사실상 일상적으로 정당이 해오는 활동의 연장선에 가까웠다. 굳이 시즌을 겨냥한 특별한 선거운동을 떠올려보자면 정당(후보자)연설을 꼽을 수 있겠는데 독일의 정당연설은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후보자 연설과는 너무 달랐다. 선거전날 베를린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정당연설회는 그야말로 축제였다. 선거가 표를 둘러싼 경쟁인만큼 주요 쟁점에 있어서는 날을 세우고 타 정당을 비판했지만 기본적으로 비슷한 신념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의견을 교환하고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공론장이었다. 삼삼오오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은 정당이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공약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선거이후 정당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서슴없이 이야기했다. 정당에 대한 것만 아니었다면 공개파티라고 생각될만큼 밝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정당 지지자들간 교류도 간간히 눈에 띄었다. 새빨간 장미색으로 가득했던 사민당(SPD)의 정당연설회에는 독일 녹색당(Die Gruenen)의 초록 풍선과 모자들이 보였다. 좌파당(die Linke)의 정당연설회에는 사민당과 독일 녹색당은 물론이고 중도우파인 기독민주당(CDU)의 검은색 외투가 함께 했다. 게다가 세련된 음악과 공짜 간식들이 길거리를 수놓았다. 유럽 내에서도 자유롭기로 유명한 베를린이라지만 어떻게 이런 정치적 자유로움이 가능한 것일까?
사진 : SPD 정당연설회 현장, 콘서트장을 방불케했다. @신나희
# 총선 그 이후
선거 당일 저녁, 나는 베를린에서 다시 만하임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를 치르는 독일에서는 정당득표율을 기준으로 정당 의석을 배분하기때문에 정당득표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연 어떤 정당이 얼마만큼 득표하게 될까? 연정이 확실시되는 이번 총선에서 어떤 연정이 탄생하게 될 것인가? 나는 설렘 반, 걱정 반으로 기차 안에서 간간히 개표결과를 지켜봤다. 그리고 그날 밤 11시가 못 되어 최종결과가 공개되었다.
물론 예상을 했지만 다음 날 실제 결과를 다시한번 눈앞에 마주하니 몇 가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첫째는 누구나 우려를 표하던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 아래 ’대안당‘)’이 기민당과 사민당에 이어 제3당(지지율 12.6%)으로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대안당은 2013년 창립되었고 같은 해 실시되었던 총선에서는 득표율 5% 미만(4.7% 득표)으로 의석확보에 실패했다. 당시 많은 독일 사람들은 전범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독일에서 극우정당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대안당은 유럽 내 난민문제를 둘러싼 독일 국내정치가 혼란스러웠던 틈을 타 4년 만에 지지율을 3배 가까이 끌어올렸고 이제는 원색적인 정치선동으로 독일사회 내의 자라나는 다양성을 짓밟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아마도 타지인의 시선에서 이들을 바라봐서 내가 느끼는 두려움이 실제보다 클 수도 있다. 처음 독일에 도착해서 마주했던 대안당의 선거홍보 포스터는 정말 소름끼쳤다. 모든 이민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며 노골적으로 ‘우리는 부르카보다 비키니를 원한다!’고 외치는 것을 보라. 물론 정치전문가들은 깊이없는 정치선동으로 자리매김해온 대안당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지만 이들이 전체 정당지지율의 12.6%를 차지했다는 것은 변치않는 사실이다.
두 번째 걱정은 독일 녹색당의 방향성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독일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독일에서 한국 녹색당의 미래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녹색당은 전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성공적이라고 평가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바덴-뷔르템베르그 주는 최초의 녹색당 출신 주지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완벽하지 않은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서 녹색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독일 녹색당이 한국 녹색당의 절대적인 롤모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독일 녹색당은 이미 기성화되었다고 평가받을만큼 연방의회 의석을 꾸준히 차지해왔고 여러 차례 연정파트너로서 집권한 경험이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원래 정당이 추구했던 가치와 반대되는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했고 이 때문에 많은 당원이 당을 떠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정당의 공약들을 분석한 연구자들의 말에 의하면 독일 녹색당이 이야기하는 이슈들은 이미 너무 보편적인 사회이슈가 되어서 타 정당과의 차별성이 사라졌다고 했다. 기껏해야 몇몇 환경이슈에서 조금 독보적인 수준이랄까? 오히려 전체적인 사회정책에서는 좌파당 정도가 되어야 꽤나 진보적인 내용들을 내놓고 있고 그마저도 기존 거대정당에서 더 현실적이고 설득력있는 안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정말로 독일 녹색당은 기성정당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일까? 독일 청년들에게도 그렇게 느껴질까? 이런 현상에 대해 독일 녹색당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독일 녹색당에 대해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은 선거홍보 기간에 선거운동원들과 관련 이야기를 제한적으로 나누었던 것이 전부다. 실제 독일 녹색당이 독일정치 지형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정당으로서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하는지는 앞으로 2년 동안 내가 파악해야 할 숙제임에 틀림없다.
# 또 하나의 장벽, 연정협상의 중단
기민당과 사민당은 서로가 대연정에 대해 선을 그어온지라 선거직후 자연스럽게 기민당, 녹색당, 자민당 간의 자메이카 연정논의가 지속되었다. 보통 연정협상은 족히 한 달 이상은 걸린다고 하는데 이번 협상은 조금 더 길었다. 세 당은 애초 협상기한이었던 11월 16일 자정을 넘겨서 19일 18시까지 재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협상논의를 중단해야 했다.
나 역시도 연정협상의 중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가늠할 바가 없었기 때문에 소식을 듣자마자 얼른 TV 뉴스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난민과 환경 이슈를 둘러싸고 세 당이 쉽게 합의에 이를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 온도차이가 느껴졌다. 영문 외신을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대다수 한국뉴스에는 ‘연정협상 실패(failure)’에 방점을 두고 앞으로 메르켈 총리가 직면해야 하는 정치적 선택지들을 나열하는 것이 전부였다. 한국 뉴스만 보면 독일 국내정치가 대혼란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런 것일까? 나는 얼른 영어로 방송되는 독일 현지뉴스, 특히 전문가 패널이 나와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는 프로그램 위주로 현지 소식을 살폈다. 현지 뉴스의 대부분은 ‘협상에 이르는 것은 분명 실패했고 그로 인해 정치적 충격이 발생한 것은 맞지만 이는 협상의 결렬(break of talk)일 뿐이며 정치적 위기는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과반수 이상의 전문가 패널들은 자민당이 연정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서 ‘잘못 통치하는 것보다 통치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대안당을 포함하는 보수세력을 끌어안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실상 지난 총선에서 모든 의석을 잃고 4년 만에 부활한 자민당의 입장에서 연정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해 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일 이유는 없어보인다. 기민당과 녹색당 사이의 간격보다 기민당과 자민당의 간격이 큰 상황에서 연정협상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자민당이 애초에 내세웠던 공약에서 퇴보하게 되는데 반해, 연정협상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줄 때 보수세력의 결집을 가져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메르켈 총리를 포함한 기민당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다. 사민당과 대연정은 이미 선택지에서 사라졌고 재선거는 기민당의 무능을 드러낼 뿐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극우정당인 대안당의 지지율이 더 올라갈 수도 있다. 자민당을 배제하고 녹색당과의 소수정부를 구성하여 운영할 수도 있지만 의석의 과반을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정을 운영해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협상이 잠정적 결렬된 것이기 때문에 자민당을 설득해서 협상의 끝을 볼 수도 있다. 사실 내 눈에는 결론이 무엇이 되든 지금의 모습이 위기상황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약간의 변주만을 허용한 채 ‘메르켈’이라고 칭해지는 안정감만을 추구해오던 독일정치의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는 모습이다.
# 나가며
어쩌면 타지인의 시선에서 내가 너무 순박하게 차가운 현실정치를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시내 곳곳에서 축제처럼 펼쳐지는 선거 캠페인이 그저 좋아보였고 선거결과가 가져온 정치의 역동성이 오히려 민주주의의 실재를 더 잘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독일이라면 이런 정치적 파도를 잘 타고 더 멀리 나아갈 것이라 믿고 있다. 내가 보고 느낀 바가 얼만큼의 정확할지, 한국에는 어떤 의미로 녹여낼 수 있을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계속 이렇게 타지인의 시선에서 독일정치를 바라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