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한 학기를 정신없이 살아내고 나니 허리통증이라는 고질병이 나를 찾아왔다. 거의 모든 시간을 앉아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각종 관절에 통증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독일까지도 나를 찾아온 이번 통증은 좀 심했다. 30분만 앉아있어도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요추가 지끈거리기 시작했고 붙이는 파스만으로 몇 주 방치했더니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나서는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되었다. 바른 자세로 누워있는 것도 고통스러웠고, 의자에 앉고 일어서는 것도 손잡이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공부는커녕 화장실을 드나드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독일에서 물리치료 받기
틈틈이 스트레칭도 해주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요가수업을 듣기도 했는데 좀 억울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잠깐, 그런데 독일에서는 어떻게 병원을 가야 하지? 한국에서라면 바로 정형외과나 통증의학과를 찾아가서 엑스레이도 찍어보고 통증주사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특정과의 전문의 진료(이차의료)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Hausarzt라고 부르는 가정의학전문의 또는 일반의의 일차진료를 거쳐서 소견서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장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일반의를 찾아갔다. 빨리 낫고 싶은 마음에 나는 허리가 너무 너무 아프니 빨리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사정했다.
나: 선생님, 원래 한국에서도 허리가 약한 편이긴 했지만 독일에 와서 심해졌어요. 한국에서는 진통제나 근육주사 같은 것도 받고 물리치료도 받을 수 있는데.. 독일에서도 가능할까요?
의사: 제가 보니까 환자분은 뚱뚱하지는 않으시네요. 환자분 말씀대로라면 운동도 틈틈이 하고는 있지만 역시 하루 종일 앉아만 있는 것이 문제네요. 근육이 없어서 통증이 더 커지는 겁니다. 아시죠?
나: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중요한 시험도 여러 개나 남았고 그렇다고 이 추운 겨울에 밖에서 운동할 수도 없잖아요.
의사: 그렇게 아프고 급하시다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진통제를 처방해드리는 것 정도예요. 2주 정도를 처방해드리죠. 다만 이건 일시적인 거예요. 근육을 키우지 않으면 허리 통증은 점점 심해질 것이고 평생 그렇게 살 수도 있어요.
나: 선생님, 그러면 혹시 물리치료도 처방도 가능할까요? 제가 보험사에 문의를 해보니까 여덟 번까지는 보험도 된다고 해서요.
의사: 하하하, 그럼 물리치료도 처방해드릴게요. 일단 10회를 처방해 드릴 테니 치료를 받으시면서 본인의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잘 살펴보세요. 혹시 더 필요하시면 그때 더 처방을 해드리죠.
아싸, 이제 물리치료도 받을 수 있다. 나는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진통제를 먹고 따뜻한 침대에 누워서 물리치료사가 해주는 마사지를 받으면 얼마나 편안할까. 게다가 독일은 재활 및 물리치료의 세계적 메카가 아니었던가.

독일 의료시스템
두근두근 물리치료 첫 날
한국은 정형외과 내에 물리치료실이 있고 병원에 고용된 물리치료사가 항상 대기하고 있지만 독일은 그렇지 않다. 일반의나 정형외과 전문의가 처방을 해주면 환자가 물리치료사 혹은 물리치료실을 따로 찾아가서 예약을 잡는 방식이다. 나는 처방전을 받아들자마자 학교 근처 물리치료사를 찾아가서 일단 5회분 예약을 잡았다.
며칠 후 나는 전해들은 대로 편안한 복장으로 수건과 물통을 가방에 챙겨서 물리치료사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따뜻한 곳에서 남이 해주는 안마를 받을 생각으로 두근두근했다. 금발의 물리치료사 선생님은 나를 침대가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굴의 넉살 좋은 사람이었다. 진료에 앞서 환자 체크를 하면서 우리가 동갑이라고 매우 반가워했고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평창올림픽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으니 말이다. 선생님은 나를 침대에 누워보라 하고 통증의 위치와 강도를 체크하더니 허리근육을 강화하는 데 좋다고 알려진 몇 가지 체조를 시켰다. 마치 헬스장 트레이너처럼 나의 자세를 하나하나 교정하고 근육의 움직임을 느껴보라고 하시더니 숙제를 내주셨다. 오늘 배운 동작을 다음 번 치료세션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10번씩 하기. 물리치료실을 나서면서 나는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물리치료가 아닌데?
일상을 바꾸기
물론 ‘물리치료’라는 범주에 다양한 치료법이 있지만 내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받아본 물리치료(Physiotherapie)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프다는 사람에게 근육강화 트레이닝이라니! 그리고 그 다음 물리치료 세션에서도 소위 빡센 트레이닝이 계속되었다. 매 세션마다 물리치료 선생님께서는 그간 내가 느꼈던 통증의 위치와 강도를 점검하고 동작을 바꿔가며 근육훈련, 아니 치료를 해주셨다. 25분 남짓 되는 물리치료 세션이 끝나면 나는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물리치료를 5회 정도 받은 뒤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나: 선생님, 원래 독일에서 물리치료가 이렇게 힘든가요? 이건 헬스장에서 트레이닝 받는 것 같아요. 물론 허리 근육을 기르는 방법은 운동밖에 없는 것은 저도 알아요. 그런데 너무 힘드네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너무 아파서 운동을 못 할 정도의 사람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선생님: 하하하, 힘드시죠? 그래도 환자분은 너무 잘하고 계시는 거예요. 동작도 굉장히 정확한 편이고 숙제도 매번 잘 해오시고! 그래서 제가 더 어려운 동작도 알려드리고 강도도 점점 높이는 거죠.
나: 사실 한국에서 받았던 물리치료는 마사지에 가까웠거든요.
선생님: 물론 마사지도 해드려요. 환자분의 경우처럼 근력강화에 집중하는 것은 물리치료 방법의 일부에 불과해요.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나 통증이 심하신 분들은 마사지나 밴드치료, 돌뜸 등 다양한 방법을 써요. 그러나 방법이 무엇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히 하는 것이에요. 물리치료가 비싸잖아요. 세션당 가격도 비싸고 보험이 안 되는 치료들도 많고요. 물리치료 몇 번 받고 일상생활에 변화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치료도 소용이 없어요. 근본적이지 않으니까요. 환자분께 숙제를 계속 내드리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독일에서의 물리치료는 환자 일상에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일시적일 수밖에 없을 의료서비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바꾸는 근본적인 치료. 통증이 다시 나를 찾아왔을 때 근육주사를 제일 먼저 떠올렸던 나 스스로를 반성했다. 사실 나 역시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근골격계 질환의 경우는 일상이 바뀌어야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뛰어볼까?
그 후 나는 물리치료를 중단하고 요가매트를 사서 집에서 매일 아침 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하는 체조는 내가 평소에 알고 있었던 동작과 물리치료를 하면서 배웠던 동작들, 그리고 인터넷에서 본 ‘허리에 좋은 동작’까지 추가했다. 사실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자율적으로 체조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얼마나 낯설던지. 단 15분 안에 모든 체조가 끝나는데도 얼마나 귀찮고 힘든지 습관으로 만드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허리통증이 살짝 가라앉기 시작한 2월부터는 근처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실 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춥다는 이유로 학교 도서관과 기숙사만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에 싫증났기 때문이었다. 또 걷는 만큼 앉아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허리에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추운 겨울의 산책은 생각보다 근사했다. 기숙사 근처에 라인강을 낀 숲길이 있어서 두툼하게 옷을 입고 한 시간 정도 걷다보면 잡생각도 정리되고 마음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3월 말이 되니 독일도 해가 제법 길어지고 차가웠던 공기도 한층 가벼워졌다. 겨울 내내 흐렸던 하늘이 맑아지고 하얀 구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갑자기, 너무나도 갑자기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운동화를 신고 숲길로 나섰다. 매일 걷기만 하던 내가 갑자기 뜀박질을 시작한다는 것은 물론 쉽지 않았다. 걸음을 좀 빨리 걷다가 5분 정도 뛰어보고 또 걷다가 5분 정도 뛰어보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여유로운 산책이 운동코스가 되고 나서는 아침 체조를 굳이 하지 않아도 하루 종일 허리가 아프지 않게 되었다. 물론 뛰기 시작한 첫날은 무릎과 발목이 살짝 얼얼했지만 뛰었다는 것 자체가 참 신기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뛰는 시간을 늘려갔다. 약 5km 되는 산책길의 절반을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되었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성취감 같은 것이 들었다. 두 달 전만 해도 끙끙 앓는 신음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고 일어났던 내가 뛰고 있다니. 그리고 이렇게 숲길을 뛰는 것이 나의 작은 일상이 되어가다니. 무엇이 나를 바꿔놓은 것일까?
나가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5월 중순, 나는 5km 산책길 중 대부분을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되었다. 1시간 이상 걸렸던 산책길이 이제 40분 내로 줄어들었다. 내 몸은 더욱 가벼워졌고 통증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일주일 중 3일 이상 뛰지 않으면 몸도 찌뿌둥하고 괜히 허리가 아파질 것 같아서 한동안 펴지 않았던 요가매트를 꺼내들기도 한다. 4-5개월 만에 운동이 습관이 된 모양이다. 만약 한국에서였다면 어땠을까? 내 성격이 급한 것도 한몫했을 것 같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분명 단기간에 효과가 좋지만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 방식의 치료를 택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가을에 10km 마라톤 대회에 도전하려 한다. 나의 일상을 바꾼 독일의 물리치료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