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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시선으로 본 독일] 내 나이가 어때서요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쉽게 ‘나이’에 대해 잊어버리곤 한다. 누군가 ‘너 몇 살이지?’라고 물어본다면 ‘내가 서른두 살이었던가 서른셋이었던가’ 혹은 ‘여기(독일)는 만 나이로 나이를 계산하니 서른한 살인가’를 한참 고민하기 일쑤다. 뒤늦은 유학에 8-10살 차이가 나는 친구들과 격 없이 어울리며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더더욱 내가 몇 살인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한국이었다면 한 살 차이에도 ‘언니/누나’ 혹은 ‘오빠’를 이름 끝에 붙여서 서로를 칭했겠지만, 독일에서는 딱히 나이에 의한 ‘호칭 정리’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사적 친분보다 공적 관계가 짙은 사람들이 나를 ‘Frau Shin’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외하면 교수님들이나 친구들 모두가 나를 ‘Na Hee’라고 부른다. 나 역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나 ‘오빠’인지 혹은 ‘동생’인지 복잡하게 계산할 것 없이 이름만으로 상대방을 부른다.

 

 

남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잇값도 못 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끊임없이 ‘나이’를 의식하는 것은 오히려 나다. 생각거리를 막론하고 ‘내 나이 서른네 살에’라는 전제가 나의 무의식 속에 숨죽이고 있다가 나를 잠식해버린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면 완성해야 하는 사회적 미션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데 나는 내 나이에 비해 무엇하나 제대로 끝내놓은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고나 할까? 예를 들어 ‘벌써 친구 OOO는 정규직 직장을 가졌는데 서른이 넘어도 한참이나 넘은 나는 아직도 학생이라니’ 라거나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친구들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아기도 한둘씩은 낳았는데 나는 서른네 살이 되도록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걸까?’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질 때가 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 스스로 ‘나이’라는 사회적 굴레를 옭매게 되는 한국식 사고방식이 나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물론 독일이라고 사람들이 ‘나이’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기도 일정 수준의 나이가 되면 성인으로서 독립하고 자신의 길/직업을 찾아야 하고, 또 개인이 원한다면 배우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정한 삶의 단계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단계별 적절한 시기에 대해 친구들과 조금 더 이야기하다 보면 사전에 규정된 ‘단계’ 나 개인의 생물학적 나이에 근거한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 개인이 살고 싶은 고유한 인생의 방향성으로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법적인 성인이 되었다면 본인이 원하는 삶을 독립적으로, 즉 개인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특정 나이가 될 때까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무언의 사회적 압박은 훨씬 덜하다. 특히나 연애나 결혼과 같이 개인의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는 개인의 선호와 선택이 중요하기 때문에 독일 사회가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소위 ‘결혼 적령기’란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존재하더라도 이를 직/간접적으로 타인에게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행동으로 치부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의 생물학적 나이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출산’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출산은 현실적 조건의 문제이자 개인 선택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 역시 나의 생물학적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인과 부모님 역시 출산의 영역에 대해서는 ‘내 나이’를 가장 중요한 변수로 생각하셨다. 서른다섯이 넘어가면 고위험 산모가 된다는 진담 반, 농담한 반 이야기를 던지면서. 다시 말해 노화라는 불가역적이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에 대해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40세 이후로 미룰 수는 없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같은 주제에 대해 독일 친구들이 내게 던지는 가장 첫 번째 질문은 바로 ‘나희야, (네 인생에서) 아이를 갖고 싶어?’라는 것이었다. 위 질문을 받고 나는 처음 몇 초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가 정말 내 인생에서 ‘아이’를 원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나 스스로조차 말이다.

 

 

‘나이’를 둘러싼 시각 차이는 나의 유학 생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에서도 잘 느껴진다. 한국에서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 나이 서른둘에 유학 가는 나를 걱정(?)하시는 분들이 꽤 많았다. 서른둘이나 되었는데 차라리 박사과정을 택할 것이지 왜 굳이 또 전공을 바꿔서 ‘기껏’ 석사학위를 받으러 가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심지어 한두 분은 위에 나열한 여러 가지 ‘서른둘의 유학 결격사유’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 나의 선택보다 오랫동안 만나온 애인을 어떻게 하고 유학에 가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도 있었다. 2년이라는 짧은 학위과정 기간이라 할지라도 자칫 결혼 시기를 놓칠 수 있다고 경고를 대놓고 날려주시는 분들 말이다. 물론 사람마다 사안에 대한 시각이 다를 수 있고 그 모두가 나에 대해 진심 어린 조언을 아껴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선택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의견의 차이를 넘어서서 모두 ‘서른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를 전제 삼아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그에 반해 독일에서는 단 한 번도 먼저 나에게 나이를 문제 삼아 혹은 이야깃거리로 삼아 질문을 던지거나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친해지기 전까지 나이에 관해 물어보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단 한 번 있기는 있었다. 바로 독일에서 정당 활동을 해보고 싶어서 관련 청년 조직에 찾아갔을 때였다. 세계적 고령사회라 그런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대략 최대 40세까지 청년의 범주로 쳐주는 곳이 많다. 아주 관대하다. 그러나 내가 찾아갔던 독일 정당 몇 군데에서는 내 나이를 직접 언급하며 청년 조직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거절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그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나에게 쉽게 나이를 묻지도 않았다. 물론 인근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하고 학생기숙사에 산다는 것을 알아서 대략 나의 나이를 짐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내가 서른이 넘는 나이라는 것을 안 뒤에도 – 주로 이 경우는 상대방이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내 나이를 밝히는 경우가 90% 이상이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나이를 내가 먼저 밝히는지는 그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분명 나의 무의식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 딱히 이를 의아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나이를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면 독일 사람들은 ‘나희야 정말 미안한데, 나는 ‘나이’라는 게 너의 의사결정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그렇게 큰 요인으로 작용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가. 그게 한국에서는 중요해?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가장 중요한 것 아냐?’ 라고 내게 반문한다.

 

 

나이에 따른 위계서열이 한국보다 현저히 희박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그러나 나이라는 별것도 아닌 계급장을 떼고 나니 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 비슷한 나이 또래일 학교를 벗어나도 단지 내가 서른 몇 살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잣대로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들의 마음속으로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그 마음이 있다 해도 겉으로 드러내는 바람에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는 없다. 나는 그저 ‘Na Hee’라는 이름을 가지는 한 인간으로 그들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 덕분에 한국에서 평생을 살며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내재화되어버린 생물학적 나이에 대한 각양각색의 사회적 압박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다. 내가 언제까지 무엇을 해내야 한다는 것보다는 내가 정말로 내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더욱 솔직하게 자신을 대면하고 있다. 비슷한 또래들의 삶과 내 소중한 삶을 비교하는 말도 안 되는 속박에서 나를 조금씩 해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과정이 독일에서는 조금 더 수월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이 듦이라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인생의 흐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와닿는다. 그러나 그 흐름과 때는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마다 다르다. 개인의 전후를 비교하면서 인생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인데 왜 개인 간 비교를 하고 있을까? 어쩌다가 한국에서는 온 사회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강요하는 시기별 인생의 퀘스트가 있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낙오자, 아니 최소 ‘조금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왜 나이가 많은 것이 절대적인 사회적 성숙도 및 성장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 개인 간 인생 비교를 끊임없이 하게 만드는 것일까?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계획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 생물학적 나이는 당연히 중요한 사항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계획에 따라 나이별 인생 퀘스트는 개인적인 것으로 남아있어야 하고 그럴 때만이 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독일에서 내가 체감하고 있는 독일 사회와 한국사회의 큰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