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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시선으로 본 독일] 낙태는 아직 독일에서도 불법입니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현재의 낙태죄(형법 269조 1항, 270조 1항1))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산부인과 의사 A씨가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7:2의 의견으로 위헌을 결정한 뒤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침해의 최소성을 갖추지 못했고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판결문에 명시했다. ‘이제 한국에서 낙태가 합법인 거야?’라고 생각했던 나는 뒤늦게 ‘헌법불합치’가 곧 낙태죄의 즉시 폐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낙태죄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 1953년에 제정되었던 낙태죄가 66년 만에 사라져야 한다는 사형선고 판결을 받은 셈이다. 내가 접했던 여러 인터넷 신문 기사에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앞두고 시위를 벌이는, 혹은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에 서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승리를 축하하는 여성들의 사진도 많았다. 저 멀리 독일에서 소식을 접하는 것만으로 나까지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형법이 한국전쟁 이후로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다는 것은 정말 놀랄만한 것이었다2). 전쟁 후 한국 사회는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경험했는가?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진보했던가? 그런데 낙태에 관련한 법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고? 이렇게 생각해보니 2018년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한국  정부에게 낙태죄 폐지를 권고했다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여성 인권을 상징하는 ‘낙태’에 관련한 법 개정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2012년에도 낙태죄에 관련한 헌법소원이 있었다3).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혐오 범죄가 세상에 알려지고 페미니즘이 사회적 이슈로 자리 잡아가면서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통제권을 가지고 재생산권을 구현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낙태를 인식하는 시각이 늘어난 것 같다. 이 모든 오랜 노력들이 지금에 와서 하나씩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2021년부터 적용될 것으로 예상되는 낙태합법화의 수준은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더 지켜봐야 한다.

그렇다면 독일에서 낙태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낙태’란 어떤 관점에서 접근되고 실제로 어떻게 행해지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해서 2019년 현재 낙태는 아직 독일에서도 불법이다. 엥? 불법이라고? 난 당연히 낙태가 합법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아직 독일에서도 불법이에요.

 

그렇다, 생각보다 독일은 보수적이다. 현재 독일에서는 1995년에 개정된 법에 의해 낙태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형사처벌 대상이다.

“임신 여성이 낙태를 원할 경우에는 적어도 수술 3일 전까지 그에 대한 상담을 받고 형법 219조에 따라 공인된 상담소에서 상담확인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그리고 낙태 수술은 임신 12주일 이내에 의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우에는 낙태가 형법 218조 1항에 따른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낙태가 법적으로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며 낙태행위 자체는 여전히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국가가 낙태 자체를 용인하지 않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여성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의학적인 요인 또는 (강간 등과 같은) 범죄적인 요인으로 인해 낙태가 필요할 경우 그것은 범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요인의 존재 여부 에 대해서는 의사가 판단하고 확인해 주어야 한다. (그런 경우) 낙태 수술은 다른 의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 독일 헌법 219조a 4) 


도대체 이 같은 법은 언제 어떻게 마련된 것일까? 독일의 낙태죄와 관련한 사항을 조사하다 보니 흥미로운 사실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낙태에 관련한 동독과 서독의 다른 규정이 독일 통일 과정에서 의외의 난관이었다고 한다. 통일 과정에서 동서 협상담당자 간 극명하게 의견이 대립하였던 사항이 낙태와 관련한 규정이었다5). 일단 (구) 동독과 (구) 서독은 각기 다른 낙태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독에 거주하는 여성들은 1972년 규정된 법률에 따라 임신 12주 내에는 어떤 상담 절차 없이 자율적으로 낙태를 결정할 수 있었던 반면 서독 여성들은 1976년 개정된 법에 의거하여 의학적인 이유 혹은 사회적 문제로 인해 낙태가 필요할 경우에 한해 전문가의 상담을 받은 후 낙태할 수 있었다. 정치체제가 달랐고 낙태라는 이슈가 윤리적, 종교적 시각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고려해보았을 때 두 독일 사이에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생각보다 극명해서 통일조약 협상 중에 담당자간 어떠한 협의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감정적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협상조약 자체가 위협을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6). 세상에나, 낙태에 관련한 규정 때문에 통일 조약이 파기될 수도 있다? 사실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그러나 이전부터 서독에서 낙태관련 규정이 사회적인 치열한 논쟁거리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통일조약 협상과정에서 낙태를 둘러싼 논리싸움,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감정싸움이 짙어진 것은 당연했다. 결국 당시 연방 수상이었던 헬무트 콜이 직접 나서서 신연방 지역(구동독)에서는 1992년 8월까지 기존의 구동독 법률이 적용되나 그 이후 규정에 대해서는 추후 통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규정한 사항이 적용된다는 과도기적 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럼 그 이후 독일 연방의회에서는 낙태에 관련한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이 과정을 살펴보면 각 정당정치의 장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두 번째 흥미로운 점이다. 앞서 말했듯 통일 독일의 연방의회는 1992년 3월까지 전체 독일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규정을 도입해야 한다는 책임을 부여받음으로써 낙태와 관련한 문제 혹은 법적 논의가 통일 독일의 주요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이 논쟁은 단순히 ‘낙태가 불법이냐 혹은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태아의 생명보호를 비롯하여 인간의 생명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와 같은 복잡한 가치관 문제, 여성의 건강권, 재생산권, 그리고 여기에서 수반되는 차후의 아동수당 등의 문제까지를 포함하는 아주 넓고 깊은 논쟁이었다. 이런 사회적 논쟁을 당시 다섯 개의 정당(CDU-CSU 기독민주당, FDP 자유민주당, PSD/die Linke 좌파당, die Grunen 녹색당, SPD 사민당)이 받아 정당의 입장으로 다듬어서 1991년 9월부터 연방의회에서 입법적 논의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연방의회의 토론은 각 연방주의 주의회에서의 토론, 그리고 시민사회 및 언론계에서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고 최종적으로는 1992년 5월 230명이 넘는 연방의원들이 초당적 법안을 제출하고 해당 법안이 채택되었다. 이 법안은 20세 미만의 여성에게 의사 처방에 따른 무료 피임약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낙태법을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임신 12주 이내에 의사에 의해 낙태 시술이 이루어지고 임신 여성이 수술 3일 전까지 상담을 통해 이와 관련한 의학적, 사회적, 법률적 정보를 제공받았을 경우 형사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법안 채택을 반대하던 중도 보수당인 CDU-CSU기독민주당와 보수적인 것으로 소문난 바이에른 주 정부가 연방헌법재판소에 위헌심의신청을 제소하고 위헌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그에 따라 연방헌법재판소의 수정안에 따른 법안이 1995년 8월부터 전 독일 지역에서 시행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정된 법안, 즉 2019년 현재까지도 적용되는 최종법안(헌법 219조)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낙태가 불법이라는 점, 그리고 불법인 낙태 중에서도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독일에서는 이루어지는 (형사처벌 대상이 아닌 불법적) 낙태는 어떻게 시행되는 건가요?  

 

법 구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생각보다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불법 낙태(?)가 이루어지기 쉬운 구조가 아닐까 싶다. 만약 임신 12주에 접어들지 않은 여성이 낙태를 원한다면 현행법에 명시된 대로 수술 3일 전까지만 상담을 받으면 된다. 그렇다면 사실상 독일에선 낙태가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부합하게 시행될 수 있는 조건이 아닐까? 


그러나 막상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현지에서 일하는 여성 인권 활동가들은 지극히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낙태조차도 그 과정이 쉽지는 않다고 이야기한다. 우선 법적 의무 상담이 중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종교기관과 연계된 상담센터는 종종 상담확인증(Beratungsschein)을 발급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여성들을 가로막는다. 또한 상담확인증을 받았다는 법에 따른 조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실제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를 찾는 것이 고역이다. 의사들이 자신이 ‘임신 중절 시술’을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 데다가 정부가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는 의료진 목록을 제공하고 있지만, 워낙 정보가 오래되어 여성 입장에서는 의사를 찾아 나서는 또 다른 산을 넘어야 하는 셈이다.

 

사실 서유럽 국가 중에서도 드물게 낙태에 보수적 태도를 취하는 독일에서도 낙태죄를 완화 혹은 폐지하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그중 최근 정치권의 ‘원칙적 동의’를 이끌어낸 이슈는 헌법 219조 중에서도 의료진의 낙태 시술 ‘광고’를 금지하는 조항을 완화하는 것이다. 현재 연방의회를 위태롭게 이끌어나가고 있는 CDU-SPD 연정은 위 조항을 1933년 나치 독일의 유산으로 규정하고 의료진들이 낙태 시술을 하고 있음을 알리는 행위를 합법화하는 법 개정안(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낙태 시술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공개/공유하는 행위는 여전히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병원의 홈페이지에 ‘임신중절(Schwangerschaftsabbruch)’ 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도록 됨으로서 낙태를 원하는 여성이 조금이라도 쉽게 정보를 찾아나설 수 있게 될 예정이다7). 솔직히 상당히 실망스럽다. 단어 하나를 허용하는 법 개정안. 도대체 임신중절을 원하는 여성들에게 무엇이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그런데 어쩌겠나,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독일 연방의회의 특성이 그러한 것을 …

 

                                                    
1) '자기 낙태죄' (형법 269조 1항)는 낙태한 여성을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백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되어 있고 '동의 낙태죄' (형법 270조 1항)는 수술한 의사도 2년 이하 징역으로 처벌받게 되어 있다. 
2)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서 일부 경우에 한해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였는데, 우생학적 허용사유 등의 조항 재구성과 사회경제적 사유 추가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오랫동안 있었다. (참고: http://todayboda.net/article/7515) 
3) 당시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헌법소원에 대해 합헌판결을 내렸다.
4)출처: 독일통일총서 8 여성분야 통합관련 정책문서 (통일부, 2014),   
5) 출처 상동 
6) 출처 상동
7) 출처: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