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6일 만하임에서
작성자: 신나희
독일에 거주하기 시작한 지 2년을 꽉 채운 요즘 드디어 조금씩 ‘정치 트렌드’라는 것이 읽히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랜만에 현실정치 이야기를 조금 꺼내 보려고 한다. 독일 정치에 대한 나의 이해가 아직 전문가 수준에는 못 미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가장 쉽고 친근하게 최근의 독일 정치 상황을 소개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을까? 내가 독일로 유학을 결심한 것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정당정치를 살피기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독일에 도착한 2017년 9월부터 독일 정치판이 들썩이며 큰 변화가 불기 시작했다. 그간의 선거를 살펴보면서 과연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는지 함께 살펴보자. 아래 [표 1]을 보면 독일에서는 최근 2~3년간 거의 매년 선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보다 선거가 빈번하게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중 연방제로 인해 서로 다른 시기에 치러지는 주의회 선거(Landtagswahl) 때문이다. 그리고 ‘연동형 비례대표제 (mixed proportional system)’을 채택하고 있는 독일의 선거제도 특성상 각 선거에서 정당별 득표율을 살펴봄으로써 선거마다 어떤 정당이 뜨고 지는지, 다시 말해 시기별 정당의 흥망성쇠와 정치적 트렌드를 가늠할 수 있다.
[표 1] 2017년 9월 이후 독일 내에서 이루어진 선거
Issue 1. 기성정당의 쇠락
독일 정치하면 떠오르는 정당이 아마도 기민당(CDU: 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과 사민당(SPD: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일 것이다. 이 정당들의 이념적 좌표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각각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라 표현할 수 있겠는데, 독일의 대표적 정당인 만큼 지지층이 두꺼워서 선거를 했다하면 정당 득표율 1,2위를 서로 앞다투며 차지했고 오랜시간 함께 ‘대연정’이라 칭해지는 연립정부를 구성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두 정당은 최근 급속도로 지지층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사실 최근의 현상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이념이 다른 두 정당이 지속적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호흡을 맞추다 보니 서로의 정체성이 희석되기 시작했고, 여기에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노동자 계급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었던 SPD 내부에서 그 경향이 두드러졌다. 오랜 기간 CDU와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더 이상 SPD가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고, 만약 이번 선거에서도 SPD가 CDU와의 대연정을 통해 타협적 정책을 수용한다면 차라리 노동계급을 현실적으로 더 잘 대변할 수 있는 다른 당에 표를 던지겠다는 SPD 지지자들 수가 늘어갔다. 그 갈등이 최고점에 이르렀던 것이 바로 2017년 연방의회 선거였다. 2017년 연방의회 선거기간 내내 CDU-SPD의 대연정이 또다시 연출될 것인지를 두고 SPD 당내 의원들과 지지자들은 치열한 설전을 벌였고, 심지어 여기에 기름을 붓는 모양으로 대연정 가능성에 대한 SPD 의 공식 입장이 여러 번 바뀌면서 지지자들은 더욱 큰 실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SPD의 입장에서 2017년 선거 전후 상황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정치적 권력을 위한 정책적 타협이란 어느 상황에서든 불가피한 것이고 타협을 피해 야당으로 남았을 경우의 감당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 역시 컸다. 많은 수의 지지자들이 대연정을 반대하는 가운데 또다시 대연정이 이루어지면 SPD 내에서는 대규모의 탈당 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실제로 2018년 한해 SPD는 약 5000명 이상의 당원이 탈당했다1). 게다가 SPD는 물론 CDU 역시 대연정 이외에 독일 국민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뾰족한 정치적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기민당-자민당-녹색당으로 완성되는 자메이카 연정? 정부 구성 실패를 인정하고 선거를 한 번 더 할 것인가? 언론을 통해 언급되었던 대연정 이외 대안들은 실제적인 가능성이 희박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성정당의 정치적 무능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기약 없이 길어지기만 하는 정부 구성 협상과 그로 인한 권력 공백은 안정성을 세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독일인들에게 괴로운 시간이었다. 정체성을 잃고 흔들거리는 기성정당의 쇠락은 2017년 이후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와 주의회 선거에서도 계속되었다.
[표2] 2017 독일 연방의회선거 정당득표율 비교 (위: 2017년 선거결과, 아래: 2013년 선거와의 대비) (출처: wikipedia.com/Bundestagswahl_2017)
Issue 2.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의 급성장
그렇다면 썰물처럼 빠져나간 기성정당의 표는 어디로 향하게 되었을까? 당연히 기성정당이 아닌 군소정당으로 향했을 것이다. 많은 신문들은 분석 기사를 통해 그간 투표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 중 약 1.47백만 사람들과 CDU 지지자 중 약 1백만 명이 창당한 지 고작 4년밖에 안 된 신생 정당 AfD (Alternativ für Deutschland)로 향했다고 밝혔다. SPD 지지자 중 50만 명, 좌파당 지지자의 40만 명 역시 AfD로 표심을 돌렸다2. 그 결과 소위 ‘듣보잡’이었던AfD는 그간 군소 야당의 대명사였던 자민당(FDP : Freie Demokratische Partei), 녹색당(Die Grünen), 좌파당(die Linke)을 가볍게 뛰어넘어 제1 야당으로 혜성같이 등장했다. 심지어 구동독 작센 주에서는 정당 득표율 2위 (27%) 를 기록했다. 유권자 입장에서 선거마다 지지하는 정당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독일의 정치지형에서 이렇게 갑작스럽고 큰 규모의 지지층 변화는 이례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AfD는 도대체 어떤 정당인가? AfD는 ‘반이민’을 주된 정책 아젠다로 삼고 2013년 연방의회 선거를 겨냥하여 창당했지만, 당시에는 5% 장벽을 넘지 못해 의회 진입에는 성공하지 못했던 군소정당이었다. 흔히 ‘극우 포퓰리스트 (Far-right populist)’ 정당이라 범주화된다. 나치와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무게를 여전히 감당하고 사는 독일에서 ‘반이민’ 정책이라니?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부터 이런 반이민 정서가 AfD라는 실질적인 강력한 정치적 동력으로 이어지게 된 것일까?
반이민 정서는 2010년 이후 급속도로 전 유럽을 휩쓸었다고 한다. 그렇다, 독일만의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차로 24시간 이내에 국경을 넘나드는 유럽 국가들은 비슷한 사회적 현상과 정치적 반응을 공유하기 마련이다. 마치 도미노 현상처럼 말이다. 2010년 전후로 중동 및 아프리카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이를 피해 국경을 넘었던 난민이 거대한 규모로 유럽으로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으로는 난민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가졌던 유럽도 전례 없는 규모에 당황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정치지도자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와중인 2015년 8월, 이례적으로 국경을 제한 없이 열기로 결정했던 것이 바로 독일이었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난민에 대한 인도적 구조 및 지원은 국가의 의무이자 유럽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임이 분명하고, 비록 대규모 난민수용에 대한 사회적 비용은 수반되겠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 (Wir schaffen das)’ 라며 독일 사회와 유럽 전체를 독려했다. 그 결과 2015년 한해 약 89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임시적으로 체류하고 있던 헝가리 국경을 넘어 독일 국경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3. 그녀의 결정에 국제사회는 환호하며 찬사를 보냈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사실 정치는 ‘좋은 의도’가 아닌 ‘결과’로 이야기해야 한다. 비록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정치적 결정이었을지 모르지만 독일 사회는 엄청난 수의 난민 수용을 감당해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89만 명의 난민이라니! 제주도를 통해 500여 명의 예맨 난민을 받으면서 한국 사회가 겪었던 진통을 생각해보라. 아무리 이민자에 대해 우호적이고 체계적인 통합정책을 갖추어졌다고 한들 독일 사회가 단기간 대규모의 난민 유입에 대한 불안감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국경을 완전히 열고 난민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이 있은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반이민 정서가 스멀스멀 독일인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대규모 난민을 태우고 뮌헨 중앙역으로 들어오던 기차를 환영하던 독일인들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의 마지막 날, 쾰른 중앙역에서 발생한 성폭행 및 강도 사건의 용의자가 ‘아랍 혹은 북아프리카에서 온 듯한’ 사람이었다는 경찰 및 주변 시민의 증언이 뒤따르면서 반이민 정서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난민 혹은 이민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범죄를 부각해서 극우 정서, 반 이민 정서를 부추긴 미디어의 역할도 컸다.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CDU 지지자 일부는 이런 범죄들이 충분한 정치적 논의 없이 이루어진 메르켈의 정치적 결정 때문이며, 독일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슬람에 대비된) 기독교 독일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일종의 특단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4. 그 표심의 변화가 2017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AfD의 급성장으로 구현된 것이다5.
[사진 1] 난민의 뮌헨역 도착을 환영하는 인파, Florian Peljak 사진, 출처: https://www.sueddeutsche.de/
아무리 최근 선거에서 선전하고 있다 한들 2019년 현재 독일에서 AfD라는 정당은 사실상 갈 곳이 없다. 유럽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극우 정당이 연정 파트너로서 집권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전범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수치심을 뼛속까지 느끼며 사는 독일에서는 예외다. AfD에 대한 지지도가 갈수록 높아져 가는 것은 상당히 우려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정당에서 AfD와의 그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협력에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고 일반적인 국민 정서 역시 AfD를 거의 나치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구동독에서는 예외다. 독일 통일은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성공적인 통일사례로 손꼽히지만, 구서독과 구동독의 경제적 차이는 여전한데, 여기서 비롯된 불만과 좌절감이 반이민 정서로 쉽게 전이되고 이를 AfD가 정치세력화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 구동독에서는 극우 집단의 시위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 2018년 8월 26일에는 작센 주 캠니츠라는 도시의 축제에서 30대 쿠바계 독일인이 이라크와 시리아 출신 20대 이민자 2명과 시비를 벌이다 살해되면서 대규모 반이민자 시위가 일어났다6. 그리고 지난 주 이루어진 구동독 작센 주, 브란덴부르크 주의 주의회 선거에서는 AfD가 정당 득표율 2위 (각각 득표율 27.5%, 23.5%)를 달성하며 한 번 더 무서운 위엄을 떨쳤다7. 그렇다, 이웃의 ¼ 가량이 극우 정치 세력을 지지한다고 상상해보라. 그 지역에서 이민자 배경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울지 사실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Issue 3. King maker 로서 녹색당의 운명
그 와중에 소리 없이 빛이 나던 정당이 있었으니 바로 녹색당이다. 최근 선거에서, 특히 2018년 헤센과 바이에른 주의회 선거에서 두드러졌던 녹색당의 선전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살펴볼 수 있다.
[그림 2] 2018년 바이에른 주의회 선거결과 (위: 2018년 선거결과, 아래: 2013년 선거와의 대비)
[그림 3] 2018년 헤센 주의회 선거결과 (위: 2018년 선거결과, 아래: 2013년 선거와의 대비)
첫째, AfD를 견제하기 위한 새로운 세력으로서의 부상이다. 실제로 2017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AfD가 급부상하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전략적 투표를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다양한 선택지 중 녹색당이 강력한 대항마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녹색당의 난민정책 현주소를 살펴보면 ‘굳이 녹색당이어야 했을까?’ 하는 개인적인 의문이 든다. 2017년 당시 연방의회 선거 정당 공약집을 정리한 아래 [표3] 을 함께 살펴보자8. 난민과 관련한 다양한 정책 이슈에서 녹색당은 사실상 기성정당 중 하나인 SPD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정책의 이념적 좌표만을 살펴본다면 die Linke가 AfD의 대항마로 적절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독일에서 녹색당은 기성정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녹색당이 최근 선전에서 상대적으로 선전하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일까?
나는 녹색당 선전의 두 번째 이유를 기후 위기로 인한 절박함에서 찾는다. ‘환경’과 관련한 이슈에서 녹색당은 단연 독보적이다. 특히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경각심은 물론이고 2018년부터 그레타 툰베르그(Greta Thunberg)가 주도하기 시작한 ‘미래를 위한 금요일 (Friday for Future)’ 시위가 독일 전역에서 열정적인 환호를 받으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 이슈를 개인적 관심사로 삼고 녹색당에 표를 던진 사람들이 늘었다. 이 경향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바로 2019년 5월에 치러진 유럽연합 의회 선거였다. 전 유럽, 아니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기후 위기에 대해 전통적인 기성정당이 시의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환경문제에 전통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녹색당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는 기후 위기 이슈가 경제나 안보와 같은 전통적인 정치적 이슈를 제치고 대다수 유럽인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정치적 아젠다로 삼고 실제 정책화해나가는 여정에서 녹색당을 신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결과 유럽연합 의회를 오랜 기간 지배하고 있었던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의석의 다수를 점하지 못하면서 결국 이들은 녹색당과 함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녹색당이 유럽 차원에서 논의되는 정책을 좌우하는 주요 정치적 세력으로 당당히 등장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갈 길은 멀다. 믿음을 정치라는 공간에서 구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니 말이다. 독일은 물론이거니와 사실상 유럽 전역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기성정당의 쇠락, 극우 세력의 등장, 그리고 기후 위기를 위한 녹색의 등장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챕터의 시작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시작이 위기일지 기회일지는 이제 두고 볼 일이다.
[표 3] 2017연방의회선거 정당공약집 (party program) 기준으로 살펴본 난민정책에 대한 정당별 입장 정리 (출처: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