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여파로 영국이 유럽에서 최다 사망자 수를 기록한 가운데, 영국 정부가 지난 3월에 발표한 코로나 고용 유지 계획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750만 노동자를 구제하기 위해 매달 120억 파운드씩 지출하는 초대형 예산안 코로나 고용 유지 계획(Coronavirus Job Retention Scheme)은 고용 안정을 위해서 정부가 사업체에 직원 급여의 80퍼센트까지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구제 대상으로만 자영업자를 포함한 사기업 종사자의 약 25%가 집계되었으며, 발표 직후 국내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4월을 기준으로 영국에서 실업 수당 신청자만 210만 명에 이르렀고, 현재 실업률은 10%를 웃도는 심각한 수준이다(파팅턴, 2020). 이는 이웃 나라 독일(5.8%)과 유럽에서 가장 양호한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는 덴마크(4.2%)에 비해 현저히 높은 수치로 기록되고 있다. 이에 현지 언론은 고용 안정을 목표로 편성된 예산안의 규모가 무색할 정도로 정작 고용주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을 의무가 부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맥고히, 2020a). 기업의 입장에서는 정부가 지급하는 임금의 80%를 수령하지 않고 노동 인구 감축을 강행해도 사실상 손실이 없는 것이다.
영국의 노동법 전문가들은 이점을 코로나 19로 인한 실업률에서 독일과 영국의 차이를 결정한 주 요인으로 봤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근무시간 조정, 연금 협상권, 노사협의체 선거, 결정권 및 거부권 등을 행사하는 데에 있어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다(맥고히, 2020b). 여기서 노동자들의 선거와 결정권이 미치는 영향권에는 중간관리자급 이상 직책의 고용 상태 또한 포함된다. 즉, 극소수의 주주들이 결정권을 독점하는 영국과는 달리, 초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낮은 실업률을 유지하는 나라에는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노동자들과 함께 결정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사내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는 점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종전 이후 독일의 노동법 작성에 있어서 고문을 맡았던 영국과 미국1에게는 특히 더 뼈아프게 다가오는 점이다.
이처럼 일자리 안정(job security)과 일터 민주주의가 비교적 잘 정착된 국가의 낮은 실업률이 두드러지면서, 영국에서도 기업 경영권에 노동자들이 결정권과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 시스템을 일컫는 일터 민주주의(workplace democracy)를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조계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일터 민주주의의 정의할 수 있다.
‘일터 민주주의는 1) 기업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 정도(정보, 협의 공동결정, 완전한 통제), 2) 통제의 수준(업무, 부서, 체제, 기업의 HQ), 3) 통제의 범위(전략적 이슈, 비전략적 이슈), 4) 통제의 형태(직접, 대표), 5) 통제의 주체(정규직 노동자, 모든 노동자)라는 다섯 가지 차원에서 정의할 수 있다. 넓게 보면, 노동자들이 민주적 수단을 통해 기업 운영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이른다]’ (조계원, 2019).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에 대해 결정권과 통제권을 어느 정도 위임받는다는 것은 곧 경제활동의 장에서 고용주의 부당한 권력 행사를 견제할 힘을 가지게 되는 것과 나아가 부당한 지배 역학의 해체를 의미한다. 민주 국가의 시민은 투표를 비롯한 다양한 정치 활동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을 관철할 수 있지만, 유독 직장에서만큼은 민주주의의 원칙과 실천이 결여되어 왔다(란데모어 & 페레라스, 2016).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근로 계약과 의사결정이 노동자들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은 채 이루어진다면, 직장 내 위계질서에 따른 권력 행사와 복종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악화할 가능성이 커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노동자의 자유를 설명하는 데에는 공화주의적 접근이 유용할 것 같다. 자유주의는 시민이 간섭받지 않는 비간섭(non-interference)상태를 자유로운 상태로 정의하는 반면, 공화주의는 이보다 더욱 세밀한 해석을 요구한다(카사사스 & 드 위스펠라레, 2016). 시민의 복지를 저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제3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용인하는 비지배(non-domination)의 원칙이 자유로운 상태의 선조건으로 제시된다. 예컨대 도박 중독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는데 관이 개입하여 그의 ‘도박할 자유'를 구속할 수 있다. 이때 중독에 빠진 사람은 그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구속이 그를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는 진정한 자유일 것이다.
또한, 도박 중독에 빠진 그의 자유를 간섭하는 주체는 도박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행정 기관과 법률 체계가 아니라 도박장을 운영하는 조직과 그 외 중독을 유도하는 환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공화주의자들은 누군가 자의적 권력을 휘둘러 다른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지배 상태를 방지하고 견제하기 위해서는 법률과 같은 공권력의 개입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권력은 분권 되고 서로 어느 한쪽의 자의적 지배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일터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는 크게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첫 번째로는, 노동자들이 부당한 요구에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 능력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유 의지에 반해 고용주의 부당한 명령에 따르게 되는 대부분의 경우는 그가 거부권을 행사할 시 급여에서의 불이익, 심한 경우 해직의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그동안 유지해오던 경제적 안위가 갑작스러운 해직 리스크에 위협받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이것이 최근에는 기본소득의 논의로 확장되고 있다. 국가가 모든 시민에게 지급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기본적인 경제적 생활 수준을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해직의 불안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다.
문제는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직장 ‘내’에서 자의적 권력이 행사되는 현상 자체를 방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기본소득 덕분에 그동안 다니고 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관두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극심한 불평등을 조장하고 노동권을 제약하는 노동법과 재산법의 구조적 모순을 직접적으로 개선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기본소득이 제공하는 ‘출구 옵션', 즉 고용 계약이 예기치 못하게 파기되어도 피고용인의 복지를 보장하게 하는 방법은 제한적이며, 이는 기본소득과 함께 추진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한다 (고르비치, 2016).
그중 하나는 고용주들의 최고소득에 한계치를 두어 그들의 권력 행사를 미연에 견제하는 방법이다. 기업의 이윤 극대화는 고용인-피고용인 간의 임금 격차와 노동자 탄압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어 왔다. 압도적인 경제력이 종종 정치적 권력으로 치환되어 부당하게 사용되며, 일부 정치학자들은 이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을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로빈스, 2019). 해직을 징계 또는 비용 최소화의 수단으로 부당하게 사용하는 고용주를 그 일례로 볼 수 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최고임금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카사사스 & 드 위스펠라레, 2016). 기본소득이 최저임금과 같이 노동자에게 생계유지의 최저 안전망(economic floor)을 제공한다면, 최고임금은 기업인이 무한한 자본 축적을 위해 피고용인의 경제적 자유를 함부로 타협하지 않게 하는 임금 천장(economic ceiling)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구조조정과 집단 해고를 감행하는 기업이 늘어난 요즘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펠프스, 2020). 임금 천장을 실질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에는 최고임금을 최저임금의 10배로 제한하거나 부동산과 상속 등을 포함해 일정 수준 이상 발생하는 소득을 100% 과세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보다 더 적극적인 방안은 사업체의 의사결정 과정을 보다 민주적으로 개편하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임직원이 직접 또는 선출직을 통해 의사결정 과정에서 결정권과 거부권을 가지게 됨으로써 기업 운영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스웨덴의 토목 기술자이자 경제학자였던 에릭 렌만의 모델이 눈여겨볼 만하다. 렌만은 기업 운영의 이해 관계자, 즉 투자자 구성을 반드시 피고용인, 사측, 소비자, 오너 일가, 공급업체, 국가, 지방정부로 구성할 것을 주문하며 이 구성원 중 하나라도 불충분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헤딘, 2019). 피고용인과 고용주의 갈등은 반드시 불필요하고 소모적이지 않으며, 협상이 갈등 해소의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오히려 건전한 기업 문화를 육성하는 뿌리가 된다. 공정한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피고용인의 열악한 사회적 위치를 개선해야 한다. 이를 위해 피고용인이 투자자의 지위를 함께 나누어 가지고 그 외 열거한 다섯 구성원이 권력 견제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서술한 일터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정당화하는 두 가지 동기를 들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하나는 직원들이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시민의식을 함양하는 공공선을 추구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접근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 시민의 뜻에 따라 국정 운영의 기조가 결정되는 것처럼 사업체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보다 규범적인 동기가 있다 (브린, 2015). 물론 혹자는 국가와 달리 기업은 개인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반론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 또한 과거에는 군주의 소유물이었으며 (고전적인 예로 권력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자본으로 권력을 보호했던 메디치 가문이 있다) 현대 국가에서는 국부(national wealth)가 더는 군주의 개인 자산이 아님을 들 수 있다(란데모어 & 페레라스, 2016). 게다가 여가 활동이나 관혼상제와 관련된 여타 사회적 활동과 달리 일터는 사람들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따라서 직장에서도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1] 4월 기준으로 미국의 실업률은 14.7%로 치솟았다(루가버, 2020). 일반적으로 미국의 노동자 권익 보호는 영국보다 열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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