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살다보면 문득 일본이라는 국가의 힘이 얼마나 큰지 느껴질 때가 많다. K-pop 으로 대표되는 한류가 유럽을 휩쓸기 전에 유럽이 아는 동아시아 국가는 일본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유럽 어느 곳을 가든 한국 기업과 음식점 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마음의 위안은 되지만, 안타깝게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외교전에서 여전히 한국은 일본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최근 베를린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두고 오갔던 한국-일본의 신경전을 살펴보면 그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마 놀라실 분도 계시리라. 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이라니! 그렇다,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지난 9월 28일 베를린 미테지구 구청의 특별허가를 받아 독일에서 최초로 공공장소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되었다. 설치 허가를 받아낸 것은 독일 민간단체인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 로 그간 독일 내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활동의 중심이었던 단체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 평화의 소녀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 한국 여성에 대한 일본제국의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상징이자, 나아가 평화와 여성인권의 상징이다. 특히 지속적인 사과와 기억의 재생이라는 과거청산 원칙을 가지고 있는 독일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러나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지 약 일주일만에 코리아협의회는 미테지구로부터 10월 14일까지 평화의 소녀상을 자진철거하지 않을 경우 강제 집행을 하고 비용을 청구하겠다는 행정명령을 받았다고 밝혔다. 아니, 이건 또 무엇인가? 설치허가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철거요구라니? 철거요구 공문에 쓰여진 가장 주된 철거이유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 ‘현재 독일-일본 양국 관계에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전쟁학살의 기억을 잊지않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독일, 그 노력이 가장 뚜렷하게 보여지는 베를린에서 내려진 이같은 결정은 정말 내게 모순 그 자체로 다가왔다.
일본 정부의 전방위적인 외교
그렇다. 예상했듯 일본 정부는 독일 정부를 상대로 전방위적인 외교압박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외무상인 도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가 독일의 외교장관인 하이코마스 (Heiko Maas)과의 전화통화에서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청했고 이어서 주독 일본대사관에서도 베를린 당국에 철거를 요청했다고 한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8년 당시 필리핀 라구나 주 산페드로시에 설치되었던 평화의 소녀상 역시 설치된지 한달이 채 되지 않아 강제철거되는 운명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 때 역시 주필리핀 일본대사관에서 필리핀 정부에 강한 압박을 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버지니아 주 애넌데일에 자리잡은 소녀상의 경우는 일본 정부의 압박으로 공공장소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한인 건물주가 제공한 사유지에 설치되는 우여곡적을 겪어야했다. 이번 베를린에 설치되는 평화의 소녀상 역시 일본 정부가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일본 정부는 제막식을 하기 전부터 발 빠르게 외교 라인을 가동시켜 독일 연방정부를 통해 미테구청을 압박하여 일주일만에 철거 명령이 떨어지게 했다.
그러나 순수하게 민간단체의 기억문화 예술활동으로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에 일국 정부의 전방위적 외교압박이라니? 그리고 거기에 찍소리도 못하고 넘어간 베를린 정부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솔직히 내게는 두 정부의 행보가 그저 어이없게 다가올 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스스로가 밝힌 바 있는 ‘책임통감과 사죄 반성의 정신’은 고사하고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제국’이라면 할법한 행위들을 반복하고 있었고, 베를린 정부 역시 전범국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뻔했다. 심지어 뒤늦게 알게된 사실이지만 베를린 미테 구청장이 녹색당 사람이라는 것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배후에서는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일본이라는 나라의 힘이 얼마나 세면 인권에 관련한 정부의 결정이 이토록 쉽게 번복되는 것일까?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Figure 1 집회 포스터: “베를린이여, 용감해라! 소녀상은 남아야 한다.”
당연히 가만히 있을 코리아협의회가 아니었다. 강제철거 명령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리고 이 소식이 언론을 타고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코리아협의회를 중심으로 연대가 재빠르고 공고하게 결성되기 시작했다. 베를린이라는 역사의 도시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사수하기 위해서였다. 철거명령이 떨어졌던 10월 6일부터 내가 이 글을 쓰는 현재시간 10월 14일까지 쉴새없이 많은 결정과 행동이 위 연대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각종 단체에서 영어, 한국어, 독일어로 성명서 및 항의서한이 작성되어 온라인/오프라인에서 부지런히 공유되었고 철거 예정일 하루 전날이었던 13일 정오에는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데모와 행진이 펼쳐졌다. 현실상 데모에 참여할 수 없었던 나는 그저 회사에서 일하면서 도대체 일이 어떻게 결론 지어질지 마음을 졸여야했다.
Figure 2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기 위한 데모현장 (출처: 연합뉴스)
퇴근 후 접한 소식은 다행히 긍정적이었다. 일단 집회에 약 300명 가량의 사람이 모였다는 것. 그날따라 날씨가 매우 안 좋았던 것은 물론이고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소식에 나는 일단 안도의 한숨부터 내쉴 수 있었다. 13일 당일 미테지구 구청장은 보도자료를 통해 소녀상 철거명령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고, 이로서 14일까지인 철거시한이 적용되지 않음을 밝혔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렇게 번 시간을 ‘복잡한 논쟁의 모든 당사자 입장과 우리의 입장을 철저히 따지는 데 시간을 사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후문이지만 구청장은 녹색당 베를린 시의회 의원들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평화의 소녀상과 관련한 사안은 아직 결론나지 않았다. 예상컨데 비문을 수정하는 조건으로 평화의 소녀상이 계속 자리하게 될 것 같다. 어찌되었건 평화의 소녀상은 그 이름이 뚜렷하게 보여주듯 평화와 여성인권의 상징으로서 전쟁없는 세계, 여성에 대한 전쟁범죄가 사라지는 날이 올 때까지 베를린에 남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