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행정은 아무래도 사람을 지치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다. 소위 관청(Amt)이라고 하는 곳은 전화로 예약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온라인 예약이 가능한 행정구역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보편화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코로나로 행정업무가 최소 1달 이상 마비 및 축소되면서 새로운 예약을 잡는다는 것은 이전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예약을 잡고 찾아가면 공무원들의 불친절함과 뻔뻔함에 한 번 더 지치게 된다. 어떤 공무원이 처리하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하는 서류가 달라지기도 하고 유선상에서 나눴던 대화와 다른 이야기를 현장에서 들어야 하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 그러다 보니 간단하게 보였던 행정 일을 처리하는 데도 길게는 몇 달이 걸릴 수 있는 것이다.
행정 처리에 관련해서 독일에서 특이한 점 하나는 ‘원본’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원본’이라는 말 자체가 나타내듯이 원본은 존재 자체로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긴 하다. 하지만 소위 ‘민원24’라는 공식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언제든 필요한 증명서의 대부분을 발급받을 수 있는 한국에 비한다면 독일에서 ‘원본’이 갖는 의미는 정말 어마무시하다. 물론 ‘민원24’에서 발급받은 증명서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원본’은 아니다. 조금 더 빳빳한 종이에 컬러 인쇄는 물론이고 물리적 잉크 자국이 남은 직인이나 압인이 선명한 원본은 생김새부터가 다르니까. 증명서는 그저 원본의 내용을 전달하는 또 다른 문서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는 이렇게 원본을 대체할 수 있는 증명서를 무료 혹은 아주 싼 가격에 언제든, 원하는 수량만큼 받을 수 있고, 이렇게 발급된 증명서로 원본을 대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원본을 분실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원본을 보관한다는 것이 워낙 중요하다 보니 거의 모든 가정에서는 각종 원본 서류 (예를 들어 학위증, 이수증, 수료증, 각종 계약서 등)를 가지런히 파일에 철해놓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파일철이 쌓이면 그것만큼 집안(혹은 그 사람)의 역사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 없을 정도다. 나 역시 독일에서 횟수로 4년 차에 접어들면서 파일철 하나가 꽉 채워졌다.
원본을 잃어버렸다고?
원본의 가치는 재생산 불가능함에 있다. 그럼 원본을 잃어버렸을 경우, 혹은 원본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완전히 복구가 불가능한 것일까?
최근 내 남자친구는 파일철을 정리하다가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어른들이 안 보는 사이에 어린 조카가 그의 학위증서 2-3장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가지런히 파일철에 다시 넣어놓았던 것이다. 고의가 아니었기에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화를 난들 찢어진 원본이 돌아올 일 만무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갈기갈기 찢어진 종이 앞에서 절망감도 잠시, 그는 학교와 교육청 등으로 재빨리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신원만 잘 증명되면 학교에서 과거 원본에 대한 재발급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나는 딱히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에도 원본을 유난히도 귀하게 여기는 독일의 사고방식에 이해가 안 갔을 뿐. 잠시 후 전화를 끊은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다행히도 원본은 재발급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담당자가 너무 친절했어. 내가 운이 좋았나 봐. 그런데 원본이 복구가 불가능하게 망가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찢어진 종잇조각들을 가져가야 할 것 같고.. 만약 그걸 증명하지 못하면 변호사를 통해서 원본이 필요하다는 법적 문서를 제출해야 한대. 그리고 재발급 비용은 장당 80유로 정도 될 것이고…”
그렇다. 원본은 불가피한 경우 재생산이 가능하긴 했다. 그러나 재생산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상에나. 그리고 장당 80유로라니. 아니, 평소에 세금을 내는 게 얼마인데 또 돈을 내라니. 나는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정말 개인 정보 때문일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유럽의 경제강국인 독일에서 여전히 종이로 된 원본 서류가 요구되고, 그리고 그 복사본을 모든 관청에서 파일철에 정리하고 보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독일 행정 영역에 있어서 전산 시스템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로 느리다. 어느 정도로 느리냐면 실제 문서 더미가 관청 A에서 B로 넘어가지 않으면 행정처리가 이루어지지를 않는다.
내 경우 올 초에 Baden-Würtemberg에서 Hessen 주로 이사를 오면서 동시에 외국인청에서 비자 연장을 신청해야 했는데, 내 문서철(관청에서 관리하는 나와 관련된 서면 파일철)이 이동해오는 일주일 이상 아무것도 진행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이런 일처리 방식이 서면으로 된 것 모두를 중시하는 독일 특유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리고 짐작하건대 독일 사회가 기술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다기보다는 개인정보 보호법을 엄격하게 지켜지기 위해 오히려 전산 시스템을 도입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민원 24시에서 발급받았던 나의 문서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조금 두렵기도 하다. 나의 기본적인 정보와 보안카드만 있다면 나에 관련한 거의 모든 문서 원본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본 자체가 독일만큼 중요하지 않은 한국에서는 이렇게 쉽게 발급받은 증명서로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테니…. 갑자기 소름이 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