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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6년, 고등학교에 ‘환경과학’이라는 교과목이 처음 생겼습니다. 우리나라 국가 교육과정에 환경을 다루는 과목이 정식으로 자리 잡은 순간입니다. 이후 2023년 3월부터는 초·중학교에서도 학교 환경교육이 의무화됐습니다. 기후위기 대응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된 상황. 이제는 환경·기후 관련 기본 소양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는 인식을 보여줍니다.
온실가스 감축, 파리협정, 지속가능발전 같은 단어는 교과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어떻게 등장했고 연결되는지는 잘 정리돼 있지 않습니다. 이 흐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국제협약은 국가 단위로 맺어지지만, 정작 그 약속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옮기고 때로는 국가보다 먼저 움직인 건 언제나 ‘도시’였다는 점입니다.
이에 국가가 아닌 도시의 시선으로 기후대응의 역사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마지막 도착점은 가장 최근에 등장한 개념 ‘기후도시’입니다.
① 지속가능발전의 역사|로마클럽에서 이클레이까지
전 세계적으로 환경보호 문제가 대두된 시기는 1970년대입니다. 급격한 산업화로 환경오염과 자원 고갈 위기가 심각해지자 가장 먼저 학계가 나섰습니다. 1972년 로마클럽이 발간한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대표적입니다. 보고서는 인구 폭발과 무분별한 경제성장이 계속되면 100년 안에 지구는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같은해 유엔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엔인간환경회의를 열고 ‘유엔인간환경선언’을 채택합니다.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란 용어는 이같은 흐름 아래 등장했습니다. 해당 용어는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가 발간한 ‘우리 공동의 미래’ 보고서에서 처음 정리됐습니다. 이때 보고서는 지속가능발전을 “미래세대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능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지속가능발전 논의가 아직 초기였던 1990년대 세계 주요 도시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43개국 200개 도시로 시작해 지금은 125개국 2,500여 개 도시가 참여하고 있는 '지속가능한 도시 발전을 위한 글로벌 네트워크 이클레이(ICLEI)'입니다.
이클레이는 국가 단위가 아니라 시장·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모여 만든 첫 국제 환경 네트워크란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1992년 185개국 국가 대표단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이하 리우회의)에서 지속가능발전 이행을 위한 행동계획인 ‘의제21’을 채택하기 2년 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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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파리협정 체결 당시 모습. 파리협정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가 탄소감축 의무에 극적으로 합의하며 체결됐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과 2025년 두 차례 파리협정을 탈퇴하며 국제 기후공조는 타격을 받았다. ⓒFlickr
② 리우회의에서 트럼프 체제까지|흔들리는 국가 중심 기후협력 체제
1992년 리우회의는 유엔의 3대 환경협약인 유엔기후변화협약, 생물다양성협약, 사막화방지협약이 체결된 역사적인 회의였습니다.
그중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은 기후대응에 있어서 국가 단위의 협력 체계가 구축됐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 1997년 교토의정서 채택으로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의무화를, 2015년 채택된 파리협정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리지 않고 모든 당사국이 감축목표를 세우도록 하면서 대응의 범위를 넓혔습니다.
그러나 국가 단위의 약속이 정치권 변화에 쉽게 흔들린다는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지난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파리협정 탈퇴 선언이 대표적입니다. 실제로 2020년 미국이 협정에서 탈퇴하며 국제 기후대응 공조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같은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며 미국은 파리협정을 즉시 재가입했습니다.
문제는 2025년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하자 다시금 파리협정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했다는 겁니다. 올해 1월에는 행정명령이 공식 발효됐고, 그 결과 미국은 파리협정을 또다시 탈퇴한 국가가 됐습니다. 같은 시기 트럼프 대통령은 한 발 더 나가 파리협정의 상위법인 UNFCCC 자체도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이로써 2027년부터 미국은 국제 기후외교에서 모든 발언권과 결정권을 잃게 됐습니다.
③ 기후동맹과 C40|도시들이 스스로 만든 기후 네트워크
국제 기후 거버넌스가 힘을 잃는 상황. 이 과정에서 주목할만한 움직임은 지역에서 나왔습니다. 미 연방정부가 발을 빼는 동안 미국 내 여러 도시와 주정부들이 독자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약속을 이어가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입니다.
2017년 설립된 미국 기후동맹(US Climate Alliance)이 대표적입니다. 여기에는 캘리포니아·뉴욕·워싱턴주 등 여러 주지사들과 로스앤젤레스, 애틀랜타, 피츠버그 등을 포함한 수많은 미국 도시의 시장들이 참여했습니다. 국가의 약속만으로는 부족하고, 도시 단위의 행동이 따로 필요하다는 인식이 이를 계기로 더 뚜렷해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유럽에선 일찍이 도시들이 협력하는 기후대응 네트워크가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2005년 영국 런던에서 켄 리빙스턴 시장이 18개 대도시를 모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협의체 ‘도시기후리더십그룹’을 만든 것이 시작입니다. 이듬해인 2006년 참여 도시가 40개로 늘었고, 이때부터 ‘C40’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2026년 기준 C40에는 97개 도시가 참여하고 있고, 이 도시 인구수만 합쳐도 9억 2,000만 명에 달합니다. 한국에서는 서울시가 1999년부터 회원 도시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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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도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삶의 질(사회적 기초)과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생태적 한계) 사이, 즉 도넛 모양의 공간 안에서 도시를 운영하자는 개념이다. ⓒ녹색전환연구소
④ 코로나19와 도시 실험의 시작|15분 도시와 도넛도시
도시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후대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실험 모델이 ‘15분 도시’와 ‘도넛도시’입니다.
15분 도시는 말 그대로 도보나 자전거로 15분 안에 일터, 상점, 학교, 병원, 공원 등 일상에 필요한 장소들을 모두 이용할 수 있게 도시를 재구성하자는 아이디어입니다. 2016년 프랑스 파리 제1대학의 카를로스 모레노 교수가 창안했습니다.
해당 도시는 2020년 안 이달고 당시 파리시장이 이를 실제 정책으로 도입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당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먼 이동이 어려워진 시기였습니다. 가까운 생활권에서 일상의 질을 높이고 도시의 회복탄력성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15분 도시는 기후위기와 감염병에 함께 대응하는 도시 전환 모델로 주목받았습니다.
같은 시기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모델로 도넛도시를 선택했습니다. 도넛도시는 영국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가 2012년 제안한 도넛경제학을 도시 정책에 적용한 모델입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삶의 질(사회적 기초)과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생태적 한계) 사이, 즉 도넛 모양의 공간 안에서 도시를 운영하자는 개념입니다.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초로 도넛모델을 도시 정책에 공식 도입한 곳이었습니다. 도시의 성장을 우선시하는 대신, 빈곤·교육격차·건강불균형 등 삶의 질 향상과 탄소배출·자원고갈 등 생태적 한계선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데 중점을 두는 방식입니다.
새로운 도시 모델, 기후도시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국제협약이 국가 단위로만 다뤄지는 동안에도 도시는 이클레이와 C40 같은 네트워크를 만들고, 15분 도시와 도넛도시 같은 실험을 이어왔습니다. 각 실험은 저마다 뚜렷한 강점이 있었지만, 동시에 한계도 있었습니다. 15분 도시는 이동권에, 도넛도시는 삶의 질과 생태적 한계 사이의 균형에 초점을 맞췄을 뿐, 기후위기 대응 자체를 정면에 내세우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후도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개념입니다. 온실가스와 기후위험을 줄이는 일과, 에너지·주거·이동·안전·일자리 같은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일을 하나의 도시정책으로 묶어내자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클레이가 도시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냈고, C40이 메가시티들의 실행력을 모았고, 15분 도시와 도넛도시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질과 생태적 한계를 실험했다면, 기후도시는 이 모든 흐름이 지금 도달한 가장 최근의 지점인 셈입니다.
기후도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원칙과 전략으로 이뤄지는지는 앞서 연재한 ‘탄소 줄이고 삶의 질 올리는 기후도시란? 7문7답 총정리’를 참고하세요.
김지연 기후시민팀 연구원
편집자주
탄소를 줄이면서 삶의 질도 함께 높이는 도시. 멀게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미 해외 여러 도시에서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지금까지의 기후정책만으로는 이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민선 9기 지방정부가 새롭게 출범한 지금이, 기후도시로의 전환을 위한 새판을 짤 수 있는 시기입니다.
녹색전환연구소는 이 변화를 먼 미래의 구호가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로 계속 전하려 합니다.



